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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맘 Nov 04. 2019

“여직원 책상이 뭐 이리 더럽나?”

보수적인 지방 공무원 조직 속 만연한 성차별

임용 후 3개월쯤 됐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무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둥글둥글했다. ‘언니오빠’와 함께 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마냥 편치만은 않았지만, 대부분이 40~50대인 사무실 속에서 유일한 20대 막내로 들어간지라 나름 예쁨을 받으며 금세 적응했다.


그렇다고 ‘성차별’에도 적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면도를 하는 것도 이해는 안 되지만 꾹 참고 못 본 척 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아재 개그도 허허실실 받아치면서 활기찬 사무실 분위기에 일조해 왔다. 하지만 “여직원 책상이 뭐 이리 더럽나?” 같은 명백한 성차별을 농담으로 받아주고 싶지는 않았다.


“왜 여직원 책상이 더 깨끗해야 하죠?”


날카로움을 숨기지 않은 내 질문에, ‘농담이랍시고’ 여직원 책상을 운운한 남자 직원은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되레 신경질을 냈다.(그 뒤로 나에게 1달 가까이 말을 걸지 않았다.) 내 옆자리 여자 직원과 농담 따먹기를 하던 중 나온 말이었다. 실제로 그 책상이 더러운 상태도 아니었다.


발언의 의도는 분명 장난이었고 악의가 없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네 직장 문화에는 ‘악의 없는’ 성차별이 너무나 많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는 법이다. 누군가는 문제 제기를 해야만 바뀐다.




성차별, 성희롱이 늘 남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한 번은 늘 묶고 다니던 머리를 풀고 출근했더니, 50대 여성 직원 분이 “어머~ 너 여성여성하구나~”라면서 호들갑스럽게 외모 칭찬을 하셨다. 따로 대화를 나누던 중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듣는 사무실에서 여러 차례 외모에 대한 언급을 하시는데 아무리 칭찬이라도 부담스럽고 거북했다. 직장에서는 외모보다 업무와 관련한 코멘트를 듣고 싶고, 마땅히 그래야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악의는 없다는 걸 알았지만 적절하지 않다고 느껴져 불편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머리를 풀고 출근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50대 아저씨인 팀장님과 둘이서 야근을 하다가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서 팀장님의 지인을 마주쳤다. 그날따라 화사한 병아리색 코트를 입고 있어서일까, 지인 분은 “웬 아가씨~?”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순간 기분이 나빴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팀장님께서 우리 직원이라며 단호하게 말을 잘라 주신 덕분에 무사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왠지 출근할 때는 그 코트를 입지 않게 되었다. 내 출근 복장은 점점 무채색이 되어 갔다.




또래 직장인들과 직장에서의 성차별, 성희롱 비화를 나누노라면 끝이 없다. 공기업에 다니는 지인이 ‘은근히 어깨나 목을 터치해오는 상사 대처법’을 공유해준 일이 있다. 깜짝 놀랐다는 듯이 ‘네! 부르셨어요?’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길을 뿌리치라는 거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세상에 그런 상사가 다 있나 싶어서 화가 나는 것과 동시에 내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가끔 짜증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안전한(?) 직장인데, 오래오래 다녀야겠다는 애사심마저 솟아났다.


그렇다. 여성은 직장의 비전이나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곳이 안전한(!) 직장인지를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직장 내 성희롱 대처 방안을 고민하기보다는 본연의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이라면 생산성도 훨씬 높아질 텐데.




공무원은 정기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과 성평등 관련 교육을 받고, 음주운전이나 성범죄로 물의를 일으키면 매우 엄하게 징계된다. 심하면 직위 해제가 되고, 연금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음주운전과 성 관련 비위만은 유난히 조심하는 문화가 있다. 요즘은 여성 공무원 비중도 무척 높다 보니, 심각한 수준의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추행 문제는 비교적 적은 것 같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조직이다 보니 의식적·무의식적인 편견과 성차별은 상당하다. 9급으로 임용되는 신규 공직자 가운데 여성은 대부분 동사무소 민원대에 배치되고, 남성은 본청의 핵심 부서로 발령날 가능성이 높다. 사무실에서 커피 심부름,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는 것도 으레 여성이다. 공무원 조직 전체로 보면 여성의 수가 더 많지만, 관료제의 피라미드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은 줄어든다. 고위직 여성 공직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 그로 인한 차별은 남성들 또한 괴롭힌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남성성의 스테레오타입-물리적 힘이 세고, 대범하고, 거칠고, 유능한 등등-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할 경우 금세 "남자가 그것도 못해?" "군대 안 갔다 왔냐?"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는 것이다. 회식 빠지기, 술 사양하기도 더 힘들다. 아무래도 남자가 '부려먹기 편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지 본연의 업무와 무관한 윗분 모시기, 각종 주말 행사에도 손쉽게 동원된다. 특히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말단 남자 직원은 '공노비'라고 표현할 정도로 각종 '시다바리'성 잡무, 힘들고 험한 일에 시달린다.




그래서 여자가 더 힘드니, 남자가 더 힘드니 하면서 성대결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남녀 모두 이런 성차별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여자라서’ ‘남자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하면 하지 않아야 할 말과 행동들이 많다. ‘여직원’ 책상이라서 깨끗해야 하거나 ‘남직원’이니까 주말도 없이 멸사봉공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의 적은 다른 성이 아니라 '꼰대'라고 생각한다.


오랜 고정관념이 바뀌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지구가 돌고 있듯, 그리고 생각보다 그 속도가 빠르듯, 우리 사회도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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