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창업가. 언뜻 보기엔 생뚱맞은 조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가와 창업가. 언뜻 보기엔 생뚱맞은 조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어 보면 은근히 닮았다. 이름 세 글자 걸고 전쟁터에 뛰어들어 자신의 ‘세계관’을 증명하며, 타자와 소통해 나아가야 하는 점이 그렇고, 소수의 주목받는 스타들 이외의 수많은 이들은 배고픈 나날들로 연명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점이 그렇다.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들을 헤쳐나가고, 자신만의 북극성을 향해야 하는 창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장편소설을 준비하는 소설가들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3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헤쳐 나가며 자신의 무의식과 대화해 나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강력한 정신력뿐 아니라, 육체적인 지구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죽음의 레이싱’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혹은 창업가로서 목표를 향해 차곡차곡 쌓아지는 일상의 '완성도'와 목표를 성취했을 때의 보람은 여타 직업군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매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여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한 남자가 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전 세계 50여 개국에 번역본이 팔리며, 국가별 판권이 몇십억 원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국의 독자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하나의 현상(Phenomenon)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매일 아침 1시간씩 달리기를 하고 이른 오후까지 집필을 마치면 간단한 소일거리와 취미생활로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게 9시 정도면 잠자리에 드는 생활 패턴으로 30년을 살아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가로서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늘은 하루키 문학의 작품성과 문학성은 논외로 하고, 그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속 다양한 통찰들을 나누어 볼까 한다. 한 분야에서 10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쌓으면 우린 이들을 ‘대가'라고 부른다던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30년을 살아왔다. 각종 뉴미디어가 난무하는 2016년 현재에도, 텍스트라는 고전적 ‘미디엄’을 통해 전 세계의 독자들과 소통하며 동시대성을 놓치지 않는 60대 작가의 통찰은 역설적으로, 포스트 모던한 한국의 스타트업과 창업가들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은(그리고 지금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솔직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 기회를 붙잡았고, 또한, 적잖은 행운의 덕도 있어서 이렇게 소설가가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예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격’이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어진 것입니다. 나로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그저 솔직히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자격을-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소중히 지켜나가면서 지금도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기뻐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 일은 또 그다음 일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이제 거장의 풍모가 낯설지 않은 30년 차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에 대한 소견은 매우 겸손하고 경건함 마저 묻어난다. “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격을 소중히 지켜 나아가며 기뻐할 수 있다는, ‘소명’에 대한 그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할 필요가 있다. 능동형이건, 수동형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자각하고 이를 평생의 업으로 감사해 할 수 있다는 프레임은 분명 ‘직업’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범주에 있다. 2002년 인맥관리 플랫폼 링크트인(Linked in)을 창업해 올해 마이크로 소프트에 약 30조 원에 인수시킨 바 있는 리드 호프먼 역시 ‘당신이라는 스타트업(The Startup of You)’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만의 북극성을 찾기 위한 여정, 즉 소명이라는 것을 찾는 것이 커리어 관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바 있다.
“미국 작가 넬슨 올그런(황금 팔을 가진 사나이, 황야를 걸어라)은 커트 보니것의 강력한 추천으로 1974년에 미국 예술 문학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집 근처 바에서 아가씨와 술을 마시고 노느라 수상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한 것이죠. 우편으로 보내준 메달은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에 “글쎄, 어딘가에 휙 던져버린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습니다···그들이 태도로서 표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 그 수의 많고 적음은 제쳐 놓고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추인(追認)에 지나지 않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창업가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의미있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실감, 그리고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 주는 고객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실감. 이 본질이 전부이다. 이 본질에 모든 것을 바쳐도 하루하루는 모자라다. 하루키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독자입니다.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처럼 본질에 충실한 삶은 필연적으로 많은 부차적인 것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때때로 '브랜드'라는 단어는 더럽다고 표현하기도 했던 스티브 잡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 자체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지요”라고 말한 바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이야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고 프로토타이핑하는 과정에서 프레임워크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풋워크가 둔해지는 경험은 대부분의 창업자가 한번쯤 겪어본 바일 것이다. 거창한 서비스의 철학과 비전을 따르다 보면 사용자경험(UX)은 백화점식 기능들로 핵심을 잃어간다. 페이스북이라는 서비스가 주커버그의 '전 세계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에서 가치를 창출한다’라는 거창한 비전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솔직하고 직관적인 도메인에서 즉흥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케이팝이 아닌 ‘강남스타일’, 그 자체이듯 우리의 오리지널리티는 그 자체로 다양한 현실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몸을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쯤 붕 떠오르게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우리의 머릿속에는-이라고 할까, 최소한 내 머릿속에는-그런 큼직한 캐비닛 설비가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서랍에는 다양한 기억이 정보로서 채워져 있습니다. 큰 서랍도 있고 작은 서랍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감춰진 포켓이 달린 서랍도 있습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필요에 따라 이거다 싶은 서랍을 열고 그 안의 소재를 꺼내 스토리의 일부로 사용합니다. 캐비닛에는 방대한 수의 서랍이 있지만, 소설 쓰기에 의식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어떤 서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머릿속에 서랍의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올라 한순간에 무의식적으로 그 소재를 찾아냅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저절로 술술 되살아납니다. 머리가 그런 융통무애(融通無碍)의 상태가 되면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말을 바꾸면, 상상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입체적으로 자유자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