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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Mar 01. 2020

내겐 너무 큰 나의 방, 그리고 훌쩍 떠난 여행

나의 독일 교환학생 일기장 네 번째




2018년 5월 16일


최근에 이런 글을 보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되고 싶고 뭘 하고 싶은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주변에 자꾸 말해야 점점 실현된다고 했다. 자꾸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게 자신에게 온다고. 그래서 오늘 카페에서 Y 오빠에게 말했다. 여행 다니면서 썼던 글을 모아 책으로 내고 싶다고,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말해보았다. 자꾸 말해보려고 한다. 글을 쓰고 싶어. 책을 만들고 싶어. 이렇게 말하다 보면 정말 언젠간 실현될지도 몰라






2018년 5월 23일


더블린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는 데는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톰 미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방문했던 아일랜드. 그의 노래만 들으면 그때의 풍경이, 모습이, 말도 안 되는 만남까지도 모두 생생하다. 아늑한 에어비앤비의 이불 촉감까지도






2018년 5월 26일


여기 애들은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Bless You'라고 말한다. 그게 여전히 참 어색하고 조금은 웃기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코를 아무렇지 않게 세게 푸는데 아무도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신기하다.






2018년 5월 29일


자기 색이 확실한 사람이 좋다. 그게 비록 조금은 이상하고 기이하고 낯설게 보이더라도.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자신만의 색을 지닌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자기만의 개성을 지닌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던 빛이 나고 아름다워 보인다.






2018년 6월 4일


너도 이 가사에 온전히 이입할 수 있을 만큼 가슴 시린 사랑을 해봤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왜냐면 내겐 여전히 잘 잡히지 않는 감정이거든






2018년 6월 16일


밀라노 베르가모 공항에서 브레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대기 장소에 떡하니 놓여 있는 야마하 피아노를 발견했다. 안 그래도 요즘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기에, 옆에 있는 H 언니에게 짐을 맡기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공항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자꾸만 떨리는 손가락 때문에 엉망으로 쇼팽의 왈츠를 쳤다. 참 무서운 게 그 몇 달간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고 악보가 기억나질 않더라. 이 곡을 친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는데도.


아쉬운 마음 가득한 안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공항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하나둘 쳐주기 시작했다. 너무 의아하고 놀라서 어떡하지, 그럼 또 무슨 곡을 쳐야 하지, 하다가 결국 <Blue Moon>을 쳤다. 긴장이 풀려서 아까보다는 덜 틀렸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니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기 시작했다. 부끄러워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는데, 바에서 와인을 마시던 아저씨들조차 내게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내가 치는 동안 나를 영상에 담고 있던 언니도, 너가 치고 있을 때 옆에서 다들 엄지를 들고 지나갔더랬다. 이렇게 마음 넓은 후한 사람들이라니. 더 멋지게 치고 싶었는데! 손가락은 제멋대로 틀린 음을 찍어댔음에도 두 번씩이나 과분한 박수를 받았다. 들뜨고 설레서 몇 분 동안이나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다.







2018년 6월 18일


갑자기 감기 기운이 있는 건, 피렌체를 떠나기 전날 욕심을 부려 4가지 맛 젤라또를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역시 과유불급이다. 안 그래도 다 먹고 선 온몸이 으슬거리는 기분이 들더라. 아아, 참깨 맛 젤라또가 참 맛있었는데.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이제 미련이 없다.






2018년 6월 19일


역시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지금 놀랍게도 독일에서 두 번째로 라면을 끓여먹었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냄비에 얼굴을 맞대고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김 때문에 자꾸만 뿌예지는 안경은 이미 벗어던졌다. 비록 물 조절에 실패한 라면이지만 상관없다. 왜 독일엔 이런 뜨끈한 국물 음식이 없는 걸까. 속이 다 시원해지는, 몸이 다 녹아내리는, 후후 불며 뜨겁게 삼켜내는 음식이 없다. 그저 독일의 날씨처럼 - 죄다 눅눅하고 건조하고 질깃한 것들뿐이다. 이곳에서 나의 구원은 역시 한국의 음식들. 때로는 달콤한 것들.






2018년 6월 21일


좋아하는 음악은 절대로 알람 벨로 설정하면 안 된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을 부비며 억지로 잠에서 깨는 내 모습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영화 <라라랜드>에 삽입된 재즈곡은 한동안 내 알람벨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바꿔야 될 것 같다.






2018년 6월 23일


라드 뮤지엄, Rad Museum. 그의 노래를 들으면 독일로 떠나기 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막막하고 애매한 날들이 생각난다. Y 언니가 내게 알려준 그의 음악. 앨범 커버에 쓰인 문장이 인상 깊다. "I don't think there's any comparision between the present hardtimes and the coming goodtimes.' Romans 8:18. Dear my Friend.






2018년 6월 24일


베를리너가 들고 다니던 에코백의 모습을 기억해? 이상하게 그들은 에코백을 어깨에 매질 않고 마치 장바구니처럼 한 손에 들고 다니곤 했다. 얇디얇은 그 에코백이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짐은 가득 들어 있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형체가 다 보일 정도다. 그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멋있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두툼한 캔버스 에코백을 주로 보았는데 이곳의 에코백은 훨씬 얇다. 슈퍼에서도 마트 로고가 크게 그려진 에코백을 팔고 있다. 아끼고 아낄수록 에코백의 매력은 사라지는 것 같다. 한껏 헤진 에코백이 멋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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