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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05. 2019

우리는 비의 리듬에 맞춰

치앙마이 한 달 살기



일요일 오후가 되면 치앙마이의 여행자들은 타파게이트로 모인다. 타파게이트에서 시작해 올드타운 안쪽 길로 길게 이어지는 선데이 마켓을 보기 위해서. 치앙마이를 기념할 만한 품목들이 거의 다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달 살기의 끝무렵,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살만한 물건이 있을까 싶어 또다시 들르게 되었다.



일요일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 타파게이트 앞부터 이어지는 선데이 마켓 풍경. 이 시간동안에는 올드타운 근처에서 그랩을 잡는 것도 힘들다.



본격적인 쇼핑에 들어가기 앞서, 입구에서 가까운 사원이 나오자마자 들어가기로 했다.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일요일 오후에는 사원 안쪽으로 길거리 음식점들이 늘어선다. 꼬치나 생과일주스 같이 간단한 음식부터 팟타이나 볶음밥 같은 제대로 된 식사 메뉴까지 다양하다.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하는 기간과 겹쳐 휴가차 이곳을 방문한 지인까지 함께하니 팟타이 하나, 게딱지 볶음밥 하나, 수제햄 꼬치를 여러 개 사서 나눠먹기로 했다.


사원 중앙의 너른 공간에는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깔려 있어서 남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된다. 볶음밥이 바닥을 드러내고 아쉬운 마음에 게딱지를 긁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어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이번에는 머리 위를 두드리는 느낌이 난다.


비가 오려나 봐.

그래? 난 모르겠는데?


우선 먹은 자리를 치우고 후식으로 과일을 사 먹기로 했다. 중간중간에 다른 먹거리도 많으니 과일을 한 봉지만 사서 나눠먹기로. 썰어놓은 과일을 투명한 봉지에 담아 파는 곳이 마침 사원의 처마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과일을 먹는 사이, 빗방울이 티 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닥 또닥 또닥 또닥. 우리는 아직 선데이 마켓 구경을 시작도 못했는데. 이제 타파게이트 입구에 겨우 들어왔는데!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일요일이었고,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일부러 선데이 마켓은 오늘로 미뤄놓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면 맞아도 될 것 같은데?

금방 그칠 것 같지?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빗방울이 눈으로 보이고 우산을 쓰지 않아도 머리와 어깨만 살짝 젖을 정도. 어차피 선데이 마켓을 구경하며 땀으로 흠뻑 젖으나 비로 조금 젖으나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평소에는 기념품을 거의 사지 않는 편인데 이곳에서는 꼭 사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 날따라 왜 그렇게 탐나는 것이 많던지. 우선 사원을 나와 아이스크림 집에 들렀다. 치앙마이를 처음 왔을 때도 사 먹었던 추억의 전통 아이스크림. 한 사람당 하나씩 사들고 먹기 시작할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물건을 파는 분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서둘러서 천막을 치거나 이미 천막을 치고 있던 분들도 투명한 비닐포를 꺼내 물건을 덮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이러다가-


쏴아아 아아아아아 아-


이러다가 엄청난 비가 쏟아지겠다는 문장을 끝낼 사이도 없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콜이라고 불리는 기습 폭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사이도 없이 한 가게의 천막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행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천막 아래 들어가 있었다. 한 손에는 방금 산 아이스크림을 들고.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빗물인지 아이스크림인지.


놀란 사람들이 높은 음의 소리를 지르면서 좌우로 뛰어갔다. '꺄아-'와 '까르르'가 섞인 소리들이 거리에 넘쳤다. 천막 아래의 상인들은 잠시 손을 놓고 옆집과 대화를 나눴다. 어떤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리는 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리라. 그 와중에 우산을 준비해 온 사람들이 여유롭게 빈 거리를 지나갔다.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확인하고 그저 서있었다.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허허, 웃는 수밖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선데이 마켓은 이런 풍경이 된다.



내가 들어간 천막은 에스닉 패턴의 원피스와 바지를 파는 곳이었다. 나는 사지도 않으면서 천막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찔려 괜스레 옷을 구경하는 척했다. 걸려있는 옷들을 살펴보니 마음에 드는 옷들이 몇 있었다. 오호라? 쏟아지는 폭우를 핑계 삼아 쇼핑리스트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원피스를 찬찬히 구경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건너편 천막에 들어가 있던 일행이 보기에 그 모습이 웃겼다 한다. '갑자기 왜 진지하게 구경을 하고 있어 ㅋㅋㅋ' 이런 느낌이었나 보다. 대신 그는 큰 키를 이용해서 천막에 고인 물을 빼는 걸 도왔다. 뒤에 서 계시던 주인아저씨가 놀라면서도 고마워하시는 것이 건너편에 있던 나에게도 보였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사러 온 사람이나 이렇게 비가 쏟아질 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만히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바닥을 튀어 오르는 빗방울과 시원한 공기. 그러다 갑자기 신난 얼굴들이 나타났다. 어디서 온 분들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일회용 비옷을 한 움큼씩 들고 팔고 있다. "레인 코트?" "레인 코트!" 더 이상의 말도 필요 없다. 뿔뿔이 흩어진 천막 속 일행들에게 눈짓으로 비옷을 살지 물어보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하자는 거지? 괜찮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지 15분 정도 되었을까? 그리고 잠시 후 정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


결과적으로 한바탕 쏟아진 폭우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쇼핑을 할 수 있었다. 도저히 비를 버틸만한 상황이 아니었거나 금방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여행자들은 선데이 마켓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9월의 치앙마이는 일교차가 큰 편인데 거기에 시원한 비까지 내려서 기온은 한결 시원해졌다. 한국의 가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날씨였다.


치앙마이의 우기를 4월에서 9월, 또는 5월에서 10월이라고 한다.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한 달을 살면서 우기의 끝자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왜인지 몰라도 비는 주로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내렸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미 비가 그친 뒤거나 비가 내리고 있는 중인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면 일어나서 가장 먼저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었다. 나무의 높이를 넘지 않는 오래된 집들과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 위로 비가 내리는 풍경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1시나 2시 즈음이 되면 비가 그쳤다. 그때서야 늦은 아점을 먹으러 길을 나서며 하루를 시작했다. 쏟아지는 비가 하루의 시작을 정해주는 셈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그런 날은 그냥 쉬었다.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빗소리가 음악소리를 배경 삼아 스탭들과 잡담도 하고, 비를 피해 후다닥 달려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책을 읽거나 일기를 썼다. 까르르 웃으며 빗속을 뛰어가는 사람들도, 가만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비 오는 날을 즐겼다. 치앙마이에서 우리는 비의 리듬에 맞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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