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Jul 13. 2019

인생의 굴곡이 상처가 된 사람에게


1억을 호가하는 작은 분재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콘테스트 같은 데서 1등을 한 분재인데, 아주 작은 나무가 마치 수백 년을 산 나무처럼 꺾어지고 뒤틀려 미니어처 사이즈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의 웅장함을 자랑했다. 작은 도기 화분에 담긴 작은 나무를 보고 있는데, 마치 수천 년 수백 그루의 고목들이 울창하게 들어선 산맥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1억은 이렇게 쓰라고 있는 돈이었구나 싶었다. 사진을 보며, '와, 분재사가 아주 세심하게 나무의 모양을 만들어내었구나...' 생각하며 기사의 스크롤을 내리다가, 기사에 달린 댓글까지 무심코 읽게 됐다.


"아... 나무가 얼마나 아팠을까..."


... 가 내가 읽은 첫 댓글이었다.

만들어낸 분재사의 노력과 치밀함에 감탄하던 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 말이 맞다. 작은 나무가 마치 천년을 산 듯한 고목의 느낌을 내기까지 그 나무는 얼마나 많이 잘리고 새살이 돋고를 반복해야 했을까. 이 모든 것이 저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무가 감내했어야 했던 고통이라고 생각하니 1억이고 뭐고, 분재사의 노력이고 뭐고, 콘테스트가 원망스러웠고, 인간의 기형적인 미학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 작은 나무를 괴롭히고 괴롭혀서 천 년은 산 것 같은 고목같이 만드는 게 왜 이토록 칭송받아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나무에게 미안했다. 끊임없이 잘리고 새살을 돋게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바르고 곧게 자라지 않고 휘어지고 감기며 올라가는 모습으로 자라며... 아니, 자라지도 못했다. 얇고 섬세한 가지를 만드느라 끊임없이 잘리고 꺾어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살아주어서 대견하고 고마웠다. 끊임없이 칼날에 베인 아주 어린아이가 상상이 되어 고통스러웠다.


이제 40이 되었다. "Over the Hill"이라는 표현이 담긴 생일 카드를 받았다. 한국말로 하면 "꺾였다" 정도의 표현이려나. 스물다섯에 꺾인 오십이라는 생각에 그토록 우울했는데 이제는 꺾인 팔십이다. 와, 내 생명력에 경이를 표한다. 이토록, 이렇게까지 살아주어서 대견하다, 혜원아. 마흔은 꽤 괜찮은 나이인 것 같다. 적당히 젊고, 적당히 늙은 나이. 아직 해볼 일들이 많이 남았고, 여태 해본 일들도 꽤 되는 나이. 아직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고, 여태 만나본 사람들도 꽤 많아 인간관계 데이터 정도는 신뢰가 갈 만큼 모아본 나이.



생채기가 난다는 것-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살갗에 끊임없이 칼로 핏물이 배어날 정도의 상처를 내고 낫기를 기다린다는 것. 종교인으로서, 조물주,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칼자국을 내고 새살이 나기를 반복하며 기다리는 분재사와 같다고 보는 것은 내게는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다. 그것은 내가 믿는 신이 아니다- 내가 믿는 신은 우리의 생채기가 고통스러워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오른 분이다.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어 우리의 생채기를 끌어안으려는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생채기가 나고, 끊임없이 새살을 돋아낸다. 끊임없이 휘어지고 꺾어지며 휘둘러 새 가지를 틔워낸다. 가끔은 꺾인 그 자리에서 머물기도 하고, 휘어진 데서 멈춰 서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생명을 그치지 않고 그 수많은 생채기를 살갗 깊이 아우르며 칼날이 머문 그 자국 그대로를 새살로 덮어 다시 성장을 시작한다.


40년을 살다 보니 가끔 상처가 너무 깊어 그 자리에 새살을 틔워냈음에도 그 안에 깊이 박힌 칼의 상흔이 아직도 아픈 사람들이 있다. 비틀고 게워내며 가까스로 그 자리에 멈추지 않고 자랐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존재 자체가 울음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쩜 마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대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살기를 선택해주어 고마운 사람들-


문제는 상처가 깊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한다. 자신의 상처를 감싸려고 틔워낸 나무껍질이 너무 두껍고 거칠어 그 마모되지 않은 거친 면으로 타인의 여린 살갗에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이번 주에 겪은 일이 아마 그런 일일 것이다. 얼마나 힘에 겨웠으면 진실과 거짓이 혼동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삶에서 진실함이 주는 눈물 한 방울 같은 연약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때로 진실함이 곧 연약함을 의미하는 세상에서- 진실은 쉽게 가면 뒤로 감춰지고, 상처를 입기보다 가면을 써서라도 상처를 가리기를 선택한 것이리라.


진실보다 거짓을 선택하고, 의미보다 가식을 선택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일주일 내내 마음을 앓았다. 마음이 아픈 사람인 것은 알겠다. 그러나 그 아픈 마음이 알지 못하는 사이 내게 날아와 부메랑처럼 상처를 입혔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혹은,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믿음에 따라 고쳐 쓸 수 없다는 깊은 믿음으로 기대를 가지지 않고 조용히 관계를 정리한다.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할 때, 내가 입은 상처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살아야 하는 거겠지. 마음 아픈 이가 낫을 휘두르듯 자신의 상처를 휘둘러 내가 베이더라도, 새살이 날 테니, 우리는 살아야겠지.

“살아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을 때는 우선은 살아보는 거라 한다. 언제야 잘 알게 될 지도 알 수 없으므로, 묵묵히 살아야 한단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름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