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을 달려 미시건 호수의 끝자락에 있는 시에나 영성센터에 왔다. 수녀님들이 은퇴한 후 머무시는 공간과 수녀회, 그리고 영성센터가 같이 운영되는 터라 몇 해 전에 왔을 때엔 은퇴 수녀님들과 나눈 식사자리가 참 즐거웠던 공간이다. 삶이 간단할 때 영혼이 빚어내는 영롱한 아름다움을 은퇴 수녀님들을 통해 볼 수 있어서, 기뻤고, 존경스러웠다.
예수께서 "세상으로 나가라"라고 하셨기에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이 신학적으로 맞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동시에 항상 새벽에 혼자 지낼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처럼, 잠깐 세상에서 나를 떼어 은수하는 것도 쉼도 되는, 영혼에 좋은 일인 듯하다.
와서 혼자 산책하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오후를 보냈다.
산책을 하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그림을 그리면서도, 나는 슬프다.
마음껏 슬피 울 자리가 필요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과 강아지를 안고 조심조심 절벽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온 것 같은 시간이었다. 거친 바람과 폭풍이 위협하듯이 불어올 땐 두 아이와 꼭 끌어안고 서로의 온기로 그 하룻밤의 추위를 오롯이 견디어냈다.
다 큰 성인이었지만 부모가 없다는 것은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음을 보듬어줄 이도, 주저앉고 싶을 때 찾아갈 이도, 세상이 격렬하게 흔들어대도 괜찮다고 다독여줄 이도 없는,
고아란 그런 것이다.
"너를 고아와 같이 두지 않겠다"는 성경의 말씀을 되뇌며, 그렇게 시간을 견디어 냈다.
그렇게 "셋이" 견디어냈다. 가만히 안고 잠은 아이의 체취와 온기로, 벼랑 끝의 추위를 견디어냈다.
그런 아이를 두 주 전에 보냈다. 엄마를 잃은 나와 동생이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주고, 아버지를 보낸 우리를 살게 해 주었던 그 아이를 보냈더니, 이제 "정말로" 세상에 동생과 나만 남은 느낌이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닌 느낌이다.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삶의 의미가 된다.
지겹도록 지지고 볶아도, 깃털같이 많아 보이는 수많은 매일의 일상이 끝날 것 같지 않을 듯이 계속되어도, 그 평범함에 들어있는 비범한 의미가 있다. 그 지긋지긋한 평범한 일상이 마음이 찢어지도록 붙잡고 싶은 그것이 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새삼 그 안에 박혀있던 의미를 지겨움의 꺼풀 사이로 알아보게 된다.
이제 내 '가족'은 더 많은 멤버가 하늘에 있다. '남은 가족'은 이곳에서 사는 것에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하는 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는 의미였다. 내 모든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두 다른 곳에 있을 때, 나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이곳에서 나는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에 혼자 두고 온 동생과 메신저를 대화를 하니, 아이도 비슷한 소리를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고군분투하는 나처럼, 동생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보다 더한 마음으로 아낀 막내를 보낸 후, 남은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강아지를 다시 입양해도 물론 되고, 지금 벌써 고양이도 두 마리나 있지만, 새로 강아지를 들여도, 지금 있는 고양이들도 "우리"일 수가 없다. 더 이상 엄마와 아빠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우리"가 된다.
"남은 자"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욥에게 사탄이 내린 시련은 그의 모든 가족을 몰살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부족한 것이 없는 그에게 하루아침 돌풍에 장성한 모든 자식과 모든 가족을 잃는다. 몹쓸 병까지 앓게 되는 욥. 그런 그를 아내마저 떠난다. 온 가족을 잃는 고통. 사람들이 저주하는 병에 걸려 혼자되는 고통.
욥기 40장을 지나며,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자녀와 가족을 허락하신다.
모든 것을 그 전과 같이 회복시켜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 전과 같았을까.
그 가족이 그에게 "우리"가 되어주었을까? "새로운 우리"가 "우리"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 가족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오롯이 "우리"를 잃은 그 고통을 욥은 어떻게 해결했던 걸까.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새 우리"와 욥은 어떻게 그의 삶을 나누었을까.
나는 "희망"을 좋아한다.
나는 "의미"와 "행복"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희망과 의미, 그리고 행복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를 알 수가 없다.
이 짧은 삶이 갑자기 길게 느껴질 때, 갑자기 엿가락이 늘어지듯 기가 막히게 늘어진 것 같은 내 여생을 나는 어떤 희망, 의미, 행복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내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내 그리워 어쩔 줄 모르겠는 가족을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영성센터에 와서 토해내듯 기도하며, 마음이 응어리졌던 슬픔을 하나님께 드리며,
나는 "보이지 않는 희망"을 마음에 담았다. "상상도 되지 않는 희망"을 품기로 했다.
무엇을 희망해야 할지, 무엇을 의미라고 해야 할 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무언가를 담을 준비를 한다. 갑자기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내 삶을, "희망"으로, 빛나는, 소중한, 행복하게 해 줄 그 "희망"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한다.
Uncertain Hope that no one -even I myself- can even imag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