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Dec 10. 2019

예민한 영혼



예민하지 않은 척을 하려 온갖 짓을 다해도, 나는 예민하다. 날이 서 있지 않은 척을 하려 해도 날은 서 있고, 오고 가는 대화를 읽기보다는 대화의 행간 사이에 있는 작은 침묵에 더 신경이 쓰이는, 그런 사람이다. 에버랜드를 놀러 갔다 온 어린 날의 즐거운 휴일 기억보다는 에버랜드를 가고 돌아오던 차 안의 애매한 정적이나 공기 속에 흩어지는 먼지에 반사되는 빛 따위를 먼저 기억하는 사람이다.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반사되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헤집어보니, 오후 두 시 졸린 두 딸을 양 팔에 눕히고 도란도란 동화를 읽어주던 엄마의 따스한 사랑보다는 두 딸이 낮잠에 빠진 줄 알고 엄마가 혼자 피곤에 싸여 내쉬던 긴 한숨을 먼저 기억해낸다. 어린 날의 나는 그래서인지 왜인지 엄마에게 내 존재를 미안해했었다. 엄마의 한숨은 아이의 영혼에 먼지가 쌓이게 한다. 그러나 엄마의 한숨은 아이가 들을 필요가 없던 공기인데, 아이는 엄마의 따뜻한 전래동화 목소리가 아닌 한숨을 기억한다.


어쩌다 부모님이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2층 침대 아래층을 쓰던 동생은 잘만 자는데, 나는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이 꺼질 때까지 함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이야기를 나누시는데도, 나는 마치 천둥이 울리듯 두 분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엄마의 숨소리에, 아빠의 기침에, 그 작은 순간에 나는 두 분의 마음을 읽어냈다. 아빠의 가시 돋친 말이 엄마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순간을 기억하고, 당황스러움과 함께 무너져 내리던 엄마의 눈빛을 기억한다. 아마도 나는 그 말이 오고 가는 순간을 보지 못했겠지만 문틈 사이로 들린 이야기에 내가 지레 상처를 받아 엄마라면 이렇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내 마음이 불러낸 환영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의 세상에 부모는 하늘과 땅이다. 맞닿은 지점에 균열이 생기는 그 작은 부분을 아이는 놓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은 균열들, 너무 미세해 일상적이기까지 한 순간들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세히 살피고 곱씹은 탓에 내가 기억하는 내 어린 시절은 온통 서걱거리는 어색한 순간들의 연속인 것 같다. 그러나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조금 큰 그림을 살피면 엄마는 직접 간식을 만들어 먹이고, 두 딸을 양팔에 안고 낮잠을 재워주는 엄마였건만. 하루를 다 바쳐 일을 하고 휴일이면 어김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에버랜드로 서울랜드로 세상 구경을 시켜주던 아빠였건만, 나는 큰 그림에 묻어있는 두 분의 사랑을 놓치고 있었다.


어쩌면 어린 내가 예민하게 파악하려고 했던 엄마의 한숨, 아빠의 서늘한 눈빛 등은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두 분이 겪어내어야 했던 삶의 고민들 아니었을까.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때의 부모님이 나보다도 어림을, 아마도 이십 대 중반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키워내느라, 그리고 같이 크느라, 하루에 한 번쯤은 몰래 한숨을 쉬어야 숨을 쉴 수 있었던 그런 존재였음을, 아주 조금 배운다.


전혀 다른 가정에서 자라 짧게 연애하고 결혼한 두 분은 아마도 우리를 키우면서 동시에 서로를 알아갔던 것이 아닐까. 좋은 날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은 그런 많은 평범한 날들을 싸워내며, 사랑하기를, 선택하기를 배워간 것이 아닐까. 두 분의 밤이 새도록 이어진 대화는 서로와 딸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을 테고, 젊음에서 나이 듦으로 시간이 옮겨가는 애매한 지점의 두 분이 삶을 위해, 딸들을 위해 이어가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는 그걸 몰랐다. 왜 몰랐냐고 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그저 지금의 나는 그때의 어린, 상처 입은 예민한, 우울한 꼬마에게 그때가 지나간다고, 그래도 네 여린 성격에 잘 견뎠다고, 오늘은 그저 문을 닫고 잠을 청하라고, 한 번 안아주고 싶다.



예민한 영혼에게도 구원이 있을까.

예민한 이에게 무뎌짐은 죽음과 같다.

예민한 이에게 무뎌짐과 둔함은 어리석음이나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함 정도씩이나 되는 엄청난 저주다.

예민했던 어린아이는 예민한 어린 영혼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고, 

아마도 평생을 이 예민함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감정을 해석하고, 때로는 깎아내려고 애쓰며 지내겠지.


여전히 공기 중에 반짝이는 먼지와 같이 스치는 순간이 백 배 확대해서 보고, 웃음과 웃음 사이에 순간 보이는 어색한 입가 근육의 뒤틀림이 신경 쓰인다. 그러나 더 이상 다섯 살, 열 살 어린 나이가 아닌 어른의 나는, 이제는 공기 중의 먼지의 반짝임에 대해서 조금은 신경을 끌 줄 알고, 어색한 입가 근육의 뒤틀림은 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문제임도 안다. 어린 날 부모의 전쟁을 마치 내 삶의 존재 이유인 줄 알고 하룻밤도 빠지지 않고 두 분의 이야기를 스파이처럼 경청한 나는, 그래도 이제는 삶의 경험이 건네는 두툼한 패드를 찬 덕에 조금은 조절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뒤를 돌아보니 내 어린 시절은 엄마의 한숨과 아빠의 서늘함으로 가득했던 것이 아니라, 딸들을 사랑한 부모의 따뜻한 애정이 가득했음을 새삼 소스라치듯 알게 된다. 두 분의 언어가 어린 내가 원했던 사랑의 언어는 비록 아니었더라도, 두 분은 두 분의 언어로 나를 사랑했음을. 그곳에 온기가 충분히 남아있음을, 나는 이제야 안심하듯 이해한다.


세상의 티끌이 모두 내 눈에 보일지라도,

가끔은 길 가 비둘기의 안녕조차도 가슴이 에일 듯 아플지라도, (가슴이 에이듯 아파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내가 또 한심하다.)

아마도 내가 내 안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면,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타인과 나를 잘 분리해내고, 상대의 눈에 비친 내가 내가 아니라, 내 마음속 깊이 달린 발라스트의 중심이 온전히 나를 향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임을 내가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나의 예민함은 어쩌면 오히려 나의 구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희망하듯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 한 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