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더욱 두려운 그것, 삶
작년 겨울에 난생처음 스키를 타보았다. 해보진 않았지만 다들 하는 이까짓 꺼,라고 생각하며 스키를 대여해서 슬로프에 올랐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서 굴러서 내려왔는데, 굴러 내려오는데도 두 시간이 걸렸다.
스키장이 있는 곳은 콜로라도의 울프 크릭(개척시대에 늑대가 많이 나왔다는 것 같다)이라는 곳이었는데, 지명 이름을 따와서 스키장의 슬로프들도 이름이
뭔가 울프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었다. 블랙울프, 다이어 울프 뭐 이런 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내가 두 시간을 굴러 내려온 슬로프는 아기늑대를 뜻하는 ‘cubs’였다 (pups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cubs는 아기 곰도 의미한다)
아기들이 타는 초보자용 슬로프였는데, 두 시간을 굴러내려온 것이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스키와 신발을 대여해서 갈아 신고 리프트를 타기 위해 올라가는데 이미 힘에 부쳤다. 헉헉 거리며 간신히 리프트 대기줄에 도착했더니
앞서 리프트를 탄 사람들이 다져온 발밑의 눈이 얼음판이 되어 눈부시게 반짝이고 거울처럼 미끄러웠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사람들은 리프트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잘도 질주해서 달려 내려간다.
세상에, 눈으로 덮인 이 날이 선 듯한 경사로를(아기들 슬로프였지만 내 눈엔 확실히 90도 각도였다)
이 미끄러운 나무판자를 발에 댄 채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아니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돈을 내가면서 하는 거지.
가장 미끄럽게 잘 미끄러질 수 있도록 고안된 나무판자를 발에 댄 채 속력을 제대로 조절할 줄도 모르는 내가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슬로프 시작점에 선 채로 스키를 타보겠다고 결정한 그날 아침의 나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아니 왜 내가 내 목숨을 이 두 개의 판때기에 걸고 있는 것인가? 야.. 내 인생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구나.. 뭐 이런 생각들.
기가 막히는데 내려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기가 막혔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기 싫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스키 고수와 함께 스키를 타며( 스키를 신은채 구르며) 내려가는데, 스키 고수가 나 때문에 몇 번을 걸려 넘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너무 구르고 넘어지니 다시 일어서는 것마저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백번쯤 넘어졌을 때 바닥에 앉은 채로 스키 고수를 올려다보며 헉헉거리는데,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2마일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그 짧은 경사로가 그토록 무서울 줄이야. 한참을 앉아서 감정을 추슬러야 할 정도였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려고 끅끅 거리며 눈물을 막고 있는데,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신나게 활강을 하고 내려간다.
어린아이 연습용 스키를 타서 아이의 스키는 뒤가 맞붙어있다. 무릎을 적당한 각도로 구부리고 아주 신나게, 폴을 옆구리에 낀 채 쌩하고 내려간다.
다섯 살짜리가 즐기는 슬로프에서 마흔두 살 먹어서 끅끅거리고 울고 있는 나.
아이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넋이 빠진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스키 고수가
아이들은 겁이 없어. 키가 작아서 넘어져도 충격이 어른보다 훨씬 덜하거든. 그래서 넘어지는 것과 속도를 무서워하지 않아.
그 당연한 말이 어쩜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을까.
두려움 없는 삶이라니.
어릴 적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어릴 적 누가 그렇게 겁이 많겠냐마는)
자전거도, 롤러스케이트도, 수영도, 가르쳐주는 이 없이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반복해서 내가 즐거워할 수 있을 만큼 몸에 익혔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마흔두 살이 되어 스키 슬로프에 서보니 그동안의 인생이 경험이 되어 속도와 제어력 상실, 미끄러운 스키 등을
죽도록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고작 ‘두려움’이라니, 싶었다.
이것보다는 나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어? 싶기도 했다.
그래서 눈물과 코를 먹으며 다시 일어나서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구르더라도 이쯤은 배우고 굴러야겠다 싶어서 조금씩 스키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렇게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몇 번 더 올라갔고, 며칠 더 되돌아갔다.
그즈음에서 멈추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두려워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나 가능할 것일까?
엉덩방아를 찧으면 그다음 날 근육통 올 것이 두려운 나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어느덧 수영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물에 빠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삶에서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된 것일까, 나란 사람은.
두려움 이기기에 정답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두려움을 완전히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는 달리, 두려움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두려움 때문에 움츠려서 어느 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