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풀거리며 흩날리는
지난 몇 달간 나의 연애는 큰 폭풍우를 만났다. 이십 대의 파릇하게 연애해서 멋도 모르고 결혼도 하던데, 그렇게 파릇한 시기에 결혼을 하지 않은 나는 중년의 위기와 결합하면서 연애가 더욱 출렁이는 듯도 하다.
혹자가 내게 말하길, "네가 하는 모든 고민은 '중년의 위기'란다"
대충격.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맞는 말인 듯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는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던 직장을 가지고, 뭐 현란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이후로 내게 가장 큰 화두는 "그래서 그다음은 무엇인데?"였다.
"이게 내가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이었나?"라는 질문은 몇 해 동안 끈질기게 괴롭히던 주제였/이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과는 다른 남자를 만나보겠다는 커다란 포부로 항상 연애에 소극적이던 내가 고르고 골라 만난 사람과의 연애는 마치 그동안 내가 이 사람 만나려고 그렇게 이상한 사람만 만났었구나 싶게 순항했다. 배가 출항을 했는데 어쩜 이렇게 2년이 다되도록 순풍에 돛 단 듯 순항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큰 목소리를 내며 싸울 일도, 어쩜 이렇게 힘들지 싶은 일은 생기지도 않았다.
만난 사람과 내 성격이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고, '중년'에 만난 탓에 서로 맞추고 타협하는 법을 잘 아는 '중년의 스킬'을 서로 이미 획득하고 있는 탓도 있었겠다. 때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부분을 만나면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이야기를 나누고 조율해가는 방법도 서로 비슷하다. 누구 하나가 동굴로 들어가거나, 벌컥 화를 내거나 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겠지.
하여튼, 뭐 아주 완벽한 순풍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정말 지중해 연안을 햇살 가득 받고 순항하는 작고 예쁜 요트 같았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계속 살 수 있으랴.
몇 달 전 아주 사소한 이유로 우리는 난데없이 크게 싸웠고, 나는 2년 만에 벌컥 화를 내며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분노를 토해내는 티라노사우르스 한 마리를 목도해야 했다. 아니 불을 뿜는 걸 본 것도 같으니까 용가리인가. 선한 눈에 웃음 주름이 선명한 것이 착한 사람 같아서 만나보기로 했던 것인데. 또 실제로 선한 눈과 웃음 주름이 어울리는, 의미와 목적이, 깊은 관계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서 아름다운 사람이기도 했다. 당연히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연애였는데, 아니 이것은 웬 분노로 가득 찬 티라노사우르스인가.
다행히 그렇게 크게 화를 낸 후, 다시 차분해진 그는 몇 시간을 앉아서 나와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는 그가 그토록 화를 내었던 것이 사실은 오해였으며 '우리는 괜찮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서로 중년인 탓에- 그동안 맺어온 관계들과 이전의 기억들이 이십 대보다는 훨씬 더 많이 축적된 탓에, 우리는 더욱 무서운 것도 많고,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 사소한 오해는 그의 상처를 건드렸고, 그는 예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상처 입은 모습을 조금 더 드러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나의 상처에 대해서, 그는 그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상처가 그에게 날카로운 칼날이 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중년의 나에게 사랑은,
나의 과거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면도칼을 손에 쥔 채, 그 면도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지 않도록 배우는 것이다. 비단 남자 친구만이 아닌,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과거는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또한 그 수많은 결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아있는 상처와 아팠던 기억들이 언제 비수가 되어 우리 손을 타고 나 자신을,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헤집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상처가 내게 비수가 되고,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비수가 되는 것을 지난 몇 해 간 보아왔고,
이 비수가 어떻게 하면 나를, 내 사랑하는 이들을 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중이다.
이 노력은 내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도 마찬가지의 노력을 우리를 위해 하고 있다.
그와 나의 노력은 진행형이다. 아마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노력은 진행형이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지금의 우리가 조금 더 사람다운 것 같다. 어찌 사람 관계가 지중해 연안을 순항하는 비싼 요트 같을까. 오늘 아침에도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마음 표면에 아지랑이 같은 감정 하나가 살포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사랑이지, 싶었다. 짠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듯 나풀거리는 이 간질한 마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