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다(銳敏하다)’
‘예민하다(銳敏하다)’는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어떤 문제의 성격이 여러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하고 그 처리에 많은 갈등이 있는 상태에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eo.nhn?id=27456601)
며칠 전 심리학자를 만나서 약 한 달 전에 했던 심리검사 결과를 듣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빽빽하게 채워진 내 심리 분석 보고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아는 내가 글로 적혀 있는 것을 읽는 것은, 마치 남이 보는 나를 내가 또 몰래 구경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내었다. 세 시간여에 달한 테스트, 단어들에 응답하고, 알맞은 단어를 선택하는 일련의 그 질문들이 이렇게 나를 그려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마치 먼지로, 작은 입자로 화한 내가 내가 선택한 각각의 단어들을 통해 심리학자의 책상 위에서 다시 내 형상을 조합해내는 것처럼, 나는 여덟 페이지의 종이 위에 활자화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심리검사는 내년에 있을 내 직업 상 중요한 인터뷰에 필요한 전 단계로, 모든 후보들은 인터뷰에 앞서 심리검사를 받아야 한다. 해당 심리검사의 결과는 모든 후보들에게도 공지되고, 마찬가지로 후보들을 인터뷰하게 될 위원회에도 보고되어 인터뷰에 앞서 후보들이 해당 직업에 '심리적'으로도 알맞은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나는 5년 전에 이미 한번 받았는데, 5년이 유효기간이라, 인터뷰에 유효한 심리 검사 결과를 내기 위해 다시 받아야 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여덟 페이지에 두세 번에 걸쳐 반복되어 나온 표현은 "그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이다. 읽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는데-.' "그녀는 일에 관련한 스트레스에는 평균을 상회하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적인 스트레스에는 상처를 잘 입는 사람입니다. 사람들과 잘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서 "No-"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창조적인 방법으로 상대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돌려서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본인이 예민한 사람이기에 타인의 고통과 필요에도 민감합니다. 옳음과 그름에 예민한 사람이라 타인에게도 옳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민한 그녀는 반면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민한 그녀는 정작 세상을 볼 때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실패를 겪어도 거기서 좋은 점을 발견해내고,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것으로 치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런 프로필의 사람들이 주의할 점은 이렇게 빠르게 치환하는 과정에서 '표현되지 않은' 분노나 좌절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내면에 쌓여 마음에 병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실제보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 있는 한계보다 더 참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가 되면 '감정적 폭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사실이다. 그러나 내 경우의 감정적 폭발은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를 향한다기 보다 혼자 화를 내고 푸는 쪽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관계 자체가 영향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뭐, 결론은 내가 선택한 직업군에 어울리는 성격과 인격 발전도를 가지고 있단다. (다행이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지 않아서.) 가끔 내가 정신이 나간 건가? 싶은 상황들이 사실은 매우 평균적인 사람들이 흔히들 겪는 '정체성 혼란'인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간혹 불안을 느끼고, 나도 그 많은 '보통'의 혼란 중 하나를 겪는 것이다.
그래서, 예민함과 긍정적인 시선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인가?
심리학자와의 미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지난 며칠 동안 내 생각은 "그래서, 예민한 사람이 긍정적일 수 있는 게 가능한가?"에 머물렀다. 예민한 영혼이 인생의 부조리에 고통스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당연할 진대, 어떻게 그 예민한 영혼이 이 모든 부조리와 고통을 목도하면서도 동시에 삶에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인가? 내가 그런 사람인데, 그렇다면 이런 일견 '인지 부조화'로 보이는 이 동시성이 내 안에서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살기 위한 방어기제인가? 예민 떨다가는 햄릿처럼 밥도 빵도 못 먹고 처절하게 울다 죽을 거라는 공포감이 주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일까?
주로 핸드폰으로 남는 시간에 앱을 열어 뉴스를 보는 나는 뉴스앱을 누르는 것이 무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연일 터지는 끔찍한 뉴스들과, 끔찍한 뉴스들에 달리는 더 끔찍한 댓글들이 한두 개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을 질식시키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퀴어축제에 대한 기사에 달리는 혐오 댓글과 축제에 난입한 반동성애 단체들, 미국 남부 국경에 아직도 붙잡혀있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 폭탄 테러로 인한 사상자와 그로 인한 이슬람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만 같아서 뉴스를 읽기조차 겁이 난다.
그러나 예민한 영혼이, 심지어 이타심마저 높은 이 영혼이라면, 지금의 나는 이 공포와 혐오에 맞서서 무언가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나는 뉴스앱을 꺼버리는 것으로 반응을 한다. 지금 당장 목을 꺽어누르는 질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얕은 방편이다. 끄면서도 죄책감에 목이 멘다. '젠장, 너 참 간단하다.'
이런 내 영혼이 긍정적일 수 있을까? 세상이 이토록 공포와 분노, 혐오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어떻게 우리는 긍정적일 수 있는가?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매번 이런 생각들에 공황 상태가 될 때마다, 나는 수사님들이나 수녀님이 쓴 글을 찾아 읽는다. 책의 표지에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구원을 만난다. '그래, 오랫동안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신 분의 얼굴이 저토록 평화로울 수 있다면, 나도 이 길의 어디에선가 구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하며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예민함에 대한 찬가(讚歌)
"예민함"의 매력이란, 삶의 레이어를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샅샅이 들여다보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데이트하는 날 잠깐 스치는 손에 팔의 솜털이 살아나는 순간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그런 순간들을 음미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둔감함'이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예민함이란, 잠깐 길을 멈추어 서서 길 고양이들이 밥을 먹었나 챙겨보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예민함이란, 거나하게 취해 친구들과 노니는 저녁 길거리에서 아스팔트 사이에 꽃을 피운 작은 들꽃을 보고 잠깐 멈춰 그 생명력에 감탄을 건네는 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예민함이란, 나를 예민하게 바라보는 만큼 타인의 숨결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그이의 삶이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둔감한 사람보다 예민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고, 세상이 쉬운 사람보다 세상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욱 경이롭다. 타인의 아픔으로부터 마치 진공관에 살듯 행복한 사람보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여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기꺼이 상처받기를 선택하는 사람들, 상처와 함께 성장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그 예민함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리라 믿는다.
적당히 무뎌져서 세상살이의 각종 상처에도 깊게 베이지 않을 만큼의 내공을 가지는 것이 사람들의 목표라고 한다.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춰 대하는 만큼, 상대도 내게 그렇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데 상대가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그런 상처가 모이고 쌓이면 상처를 덮는 딱지가 덮이고 쌓여 마음의 예민함은 무뎌지고, 우리는 삶에 대한 경탄을 잃게 되지 않을까. 인간관계에 쉽게 상처받는 나는, 그렇지만 무뎌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삶을 매 순간 찬탄하고 경외하고 싶어서이다. 이 혐오와 공포의 세상에, 그래도 사랑하는 이의 미소 한 순간이 주는 카타르시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은 그 한 순간에 축약되는 것이지 않을까. 마음을 나누는 것이 두려운 순간을 넘어,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었을 때의 그 희열. 그 순간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이어가게끔 하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그러니 예민한 자들이여, 마음껏 예민하고, 마음껏 순간을 사랑하라. 예민한 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