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커스 :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2018>
십 대 시절 친구들과 함께 만든 영화를 도둑맞은 지 20여 년이 지난 뒤. 난데없이 필름을 돌려받게 된 주인공 샌디는 한 때 있을 뻔 했던 영화 <셔커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영화는 많은 의문들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그 갑작스런 상실 이후의 우정과 꿈, 가능성들을 다시 마주한다. 어쩌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들에게 그건 어떤 의미였는 지, 그리고 모든 걸 훔쳐간 '조지 카도나' 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인지.
조지라는 정체불명의 미국인은 영화 제작 클래스를 운영하며 세 소녀들과 우정을 쌓고, 함께 영화를 만들게 된 인물이다.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돌파구가 없던 샌디에게 조지는 꿈을 발견해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싱가포르를 누비며 다양한 상상력을 펼쳐 영화를 완성한다. 그리고 샌디와 친구들이 학교로 돌아간 사이, 조지는 영화의 필름을 전체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 연락이 두절된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영화는 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샌디는 새로 개봉한 영화들을 볼 때마다 <셔커스>의 유령을 마주한다. 비슷한 대사, 비슷한 구성, 비슷한 씬. 그 영화들이 세상에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는 샌디의 아이디어를 따라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쩌면 <셔커스>는 그런 영화들이 될 수도 있었다.
20여 년이 지나고 샌디는 조지가 죽었다는 편지와 함께 필름을 다시 돌려받는다. 하지만 사운드는 모두 날아간 상태. 샌디는 이제 영화를 도둑맞은 사건을 토대로 다시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기억을 되짚어보는 일은 피할 수 없이 겪은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야 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다큐멘터리 속에서 샌디와 두 친구 - 자스민과 소피 - 는 당시의 서로를 비난하기도, 오해를 풀기도 한다. 이들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90년대 싱가포르의 풍경이나, 아이디어와 기발함이 넘쳐 흐르던 사춘기 시절, 영화를 만들며 공유했던 결속력과 우정, 심지어는 악당인 조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 마저도.
샌디와 친구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의 영화를 돌연 훔쳐간 조지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나름대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의문이 남는다. 영화를 완성시키지도, 파괴할 작정도 아니면서 그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나는 영화학도였던 대학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샌디의 독백처럼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에 들 수 없었던, 아이디어를 찾으러 떠났던, 유년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막고 싶었던, 진심으로 영화를 사랑해서 만들고 싶던 순간들. 주말을 바쳐 영화를 찍고, 밤을 새워 편집하고, 새벽녘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누비면서 한 번도 청춘이 아깝다고 느껴본 적 없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내 마음은 달라졌다. 당시 나는 매일 같이 현실적인 것에 대해 얘기했다. 영화는 너무 멀리 있고, 내 안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은 죄다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느껴졌다. 눈 앞에 닥친 취업, 밥벌이, 책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걱정됐고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제 어디에도 속할 곳이 없다는 부담감과 시간이 흘러간다는 조급증이 나를 잡아먹었다.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여자라서 시간이 없으니까. 취업 준비 세 달 만에 밥도 넘어가지 않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일 해보지 않고는 몰라, 세상을 일단 제대로 살아봐야 해. 세뇌처럼 주문처럼 말했다. 꿈을 먹고 살았던 내 자신이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처럼 느껴져서 대학시절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었다.
내 꿈으로부터 나는 도망쳤다.
돌이켜보면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배우고 만들며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됐음에도. 우리 모두의 삶에 한 번 쯤, 손에 닿을 듯 했던 꿈을 한 순간에 증발시켜버리는 '조지 카도나'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어느새 '조지 카도나' 만을 탓하기엔 너무 나이가 먹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꿈을 강탈당한 세 소녀는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꿈을 지켜낸다. 그리고 각기 영화감독, 작가, 영화교수가 됐다. 나 역시 내가 꾸던 영화의 꿈은 잃었지만, 다른 꿈을 만났고 이 꿈을 의미와 가치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화를 보며 이런 감상을 쓰는 것이 내게 남은 영화의 유령이리라.
샌디는 세월이 흘러 다시 보게 된 <셔커스>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꿈이 꼭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인생은 생각보다 괜찮다. 어쩌면 어떤 꿈은 꾸는 것 자체로 아름다운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