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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Sep 17. 2018

동경, 브람스가 카르멘을 사랑한 이유

브람스 피아노 소품집 op.119 vs 비제 카르멘

https://youtu.be/57__VHOJGQ4

브람스:4개의 피아노 소품집 op.119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https://youtu.be/NPPzNgBsN6g

비제:카르멘

테레사 베르간자, 플라시도 도밍고, 일레나 코트루바스 외/암브로지안 합창단/런던 심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근본적으로 슬픈 사나이, 브람스

 브람스의 말년 작품인 4개의 피아노 소품집 op.119는 들어 보면 극단적이리만큼 슬프다. 그냥 “슬프네”수준이 아니다. 두 눈이 우는 수준이 아니라,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넘쳐흐르는 눈물이 느껴진다. 가슴에서 눈까지의 거리가 꽤 되는 만큼, 이 슬픔을 한 소절만 듣고도 인식하는 것은 어려우나 일단 인식이 되고 나면 안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심장이 통째로 들려 나가는 느낌 그 자체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 브람스의 정서는 바로 브람스의 핵심이다. 슬픔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 없다. 그냥 날것 그대로의 슬픔 그 자체다. 이 곡의 정서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자신의 마음에 큰 슬픔 또는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듯 브람스는 근본적으로 슬픔이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부분은 역시 클라라에 대한 연모의 감정일 것이다. 거기다 브람스는 음침한 기후로 악명높은 함부르크가 고향이다. 그 기질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브람스는 음악에 대한 이상이 드높았고 자기 자신에게 극도로 엄격했으며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브람스의 작품 목록 중에는 오페라가 한 곡도 없는데, 그 이유는 그의 음악적 이상에 부합하는 리브레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브람스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기록된 것만 봐도 브람스는 무려 스무 번이 넘게 “카르멘”공연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원색적인 카르멘, 그렇지 못한 브람스의 아련한 동경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브람스가, 어찌 카르멘에 열광했을까? 물론 카르멘은 타음악가들의 성향을 초월해 극찬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왠지 브람스만은 아닐 것만 같다. 일단 음악의 컬러 자체가 너무나 다르다. 브람스 음악의 빛깔은 대개 회색빛 아니면 갈색 같은 어둡고 차분한 빛깔을 띤다. 그런데 카르멘은 다르다. 대놓고 원색적이다. 스토리부터 대단히 원색적일뿐더러 음악도 엄청나게 자극적인 부분이 많다. 물론 음악적으로 따져 보면 신들린 듯 뛰어나지만, 내용을 보면 적어도 브람스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랄 생경하고 자극적인 소재들로 가득하다. 카르멘에 열광한 브람스의 심리란 대체 무엇일까? 절간에서 10년은 도를 닦은 스님이 장안에 소문난 명기의 유혹에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에 비유하면 너무 천박한 비유일까?

힘들고 때론 넘어질지라도, 자기다운 게 아름답다
 추측건데 브람스는 스스로 자신의 성격에 힘들어한 것 같다. 앞서 처음 언급했던 피아노 소품집 op.119에 단서가 있다. 여기 있는 네 곡의 자유로운 곡들의 정서는 수목드라마에서 느끼는 최루성 신파조와는 근본이 다르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지배한다. 그 정서가 말년에 가서 두텁게 쌓인 포장지를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곡들이다. 그런데 슬픔에 계속해서 노출되다 보면 일상생활이 어려워진다. 그걸 잠시만이라도 가리려면 아예 다른 류의 자극이 필요하다. 그 조건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카르멘의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음악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던 셈이다. 만약 카르멘의 리브레토가 비제가 아닌 브람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브람스의 성격상 때려죽여도 카르멘의 리브레토에 어울리는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음악을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리브레토 선에서 정리되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한 여인 클라라만 지고지순하게 바라봤던 이 우직한 남자가 카르멘의 리브레토가 품고 있는 자유롭고 때로는 방종스럽기까지 한 내용이 소화가 가능했을까?

 이것 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모순된 어떤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는 없다. 브람스가 카르멘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은 “동경”일 것이다. 그렇다고 브람스가 카르멘 스타일로 음악을 써낼 수는 없었다. 카르멘의 모든 아리아와 합창곡들을 샅샅이 분석해서 따라하기는 할 수 있었을지언정 스피릿까지 유사하게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근본적인 성격이 다른데 어떻게 그리 하겠는가? 어쨌든 비제는 이 역작을 완성하고 불과 3개월 만에 37세의 젊은 나이로 갔고, 브람스는 최후까지 자신의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쓰다가 세상을 떴다.

 동경은 동경으로 끝나야 아름다운 법이다. 동경하는 대상에 직접 발벗고 들어갔다가 가시에 맨발이 찔려버릴 수도 있다.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음악을 지키다 갔다. 본인은 괴로웠을 수도 있지만 브람스는 브람스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상상을 해보자. 브람스가 카르멘을 딱 접하는 순간 자신의 음악을 모두 던져버리고 비제 따라하기에 매달렸다면 지금 위대한 그 이름 브람스는 없을 것이다. 당장 객관적인 이름값으로 따져 보자. 비제는 카르멘 한 곡만으로 이름이 남아 있다시피 하지만, 브람스는 다르다. 이미 걸어온 족적 자체가 전설이 되어있다. 바흐,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일컬어지는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올려놓고 있지 아니한가? 아주 질나쁜 뭔가가 아닌 이상, 나다운 것 그리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브람스의 그 슬픈 피아노 소품들이 그걸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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