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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Sep 21. 2018

슈만과 고흐, 알고보면 소름돋는 평행이론

인생 자체가 너무나 아픈 두 손가락

https://youtu.be/TF280ui9m4s

슈만:환상소곡집 op.12

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


필드만 다르지 심장을 공유한 슈만과 고흐
 슈만은 내겐 “아픈 손가락”이다. 다른 작곡가들보다 더 좋아한다는 표현 정도로는 내가 슈만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이상의 것들이 있다. 그것도 가슴 아린 워딩을 담아야지만 비로소 스스로 실감이 난다. 애착 위에 애틋함, 또 그 위에 까진 상처의 딱지를 억지로 떼어버린 듯한 쓰라림이 존재한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내 몸 안에서 심장이 안팎으로 들락날락하는 느낌이랄까?

 한편, 나는 미술 쪽은 거의 모른다. 같은 예술의 영역이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경우 내 심장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빈센트 반 고흐는 다르다. 그의 인생에 대한 기록을 볼 때마다 놀란다. 슈만의 그것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만 같은 소름 돋는 평행이론 그 자체다. 단지 필드만 다를 뿐이다. 아, 다른 것이 또 있다. 고흐는 1853년생이고 슈만은 185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한 하늘 아래 공존한 기간은 불과 3년이다. 만약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갔더라면, 모차르트와 리브레토 작가 로렌초 다 폰테의 합작을 능가하는 영혼의 케미가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때로는 공포스러운 그들의 평행이론
 슈만과 고흐, 이 둘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제 갈 길을 너무 늦게 찾았다는 것이다.  슈만은 법조인이 되려고 했었고, 고흐는 목회자가 되려고 했었다. 그런데 법조인이든 목회자든, 둘 모두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사람에게는 상극인 직업들이다. 당장 이 나라의 법조인들과 목회자들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심하게 말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에게 더 어울릴 듯한 직종이 바로 법조인과 목회자다. 어쨌든 이들은 제 갈 길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슈만의 음악과 고흐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극히 섬세하고 격정적인 감정들은 바로 그들의 제 갈 길을 찾는 치열한 사투에 그 근본이 있다. 슈만이 자신의 내면에서 부딪히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존재들로 인해 평생 모순된 갈등을 안고 살았던 것처럼, 고흐도 그러했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복수의 감정들이 늘 고흐의 내면에서 지각이 충돌하듯 부딪히고 있었다. 그 뿐인가. 이 두 남자는 주위 사람들의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격정적인 사랑을 경험했고 정신병원 입원도 나란히 경험했다. 또한 평범한 주위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해 자신과 감성을 공유할 예술가들을 애타게 찾아다니기도 했다. 슈만에게는 브람스, 고흐에게는 고갱이 딱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이렇게 대략적으로 훑어보기만 해도 슈만과 고흐는 필드만 달랐지 복사판이라 해도 좋을 만큼 유사한 삶을 살다 갔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두 사람 모두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별난 인생들이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인생이 지금 위대하게 회자되는 슈만과 고흐를 만든 건 확실하다.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의 활동반경에 속했던 유럽의 두 도시, 츠비카우와 아를을 모두 들러본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더욱 실감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두 도시에서는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둘 다 생겼는데, 츠비카우는 다른 도시로 가려던 열차를 놓치는 해프닝 끝에 밟은 땅이고 아를에서는 도시를 다 둘러보고 아비뇽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렌터카의 바퀴가 도랑에 빠지는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예술의 여신은 내가 사랑하는 이 두 예술가가 몸담았던 곳들을 그냥 눈으로만 담고 보내려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혼란을 주기에는 충분한 사건을 두 도시에서 모두 겪으며, 일상적이라고 할 만했던 그들의 혼란이 지금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는 위대한 예술이 되었음을 맛뵈기로나마 느꼈다고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경험 하나 더 고백한다. 슈만을 좋아하는 나는 고흐를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한 때 잠시나마 연인 관계였다. 연인으로서는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결국은 영혼을 깊이 나누는 친구가 됐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 사람과 나는 최소한 동시대에 살고는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과 나의 친근한 관계를 통해 슈만과 고흐가 시대만 같이 살았다면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대신 증명하고 있으니까.

https://youtu.be/T2m_eqBQ10k

슈만:다비드 동맹 춤곡집 op.6

안드라스 쉬프,피아노


동시대에 공존하지 못한 두 남자
 이 두 남자의 생몰년도가 적힌 숫자들을 쳐다보고있으면 또 한 번 가슴이 아려 온다. 필드만 달랐지 너무도 비슷했던 두 사람. 신은 동시대에 두 사람이 공존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로의 심장을 맞교환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동시대에 공존했더라면,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만났더라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상상은 자유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동시에 아리고 아프기도 할 것이다. 아리고 아픈 이유는 뭘까?심장을 맞교환해도 좋을 법한 소울메이트의 존재는 작정하고 찾아 다녀도 찾기 어렵다는 명제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생몰년이 말해 주고,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 풀이해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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