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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Sep 24. 2018

뮤즈의 은총,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멀어버린 귀 대신 얻은 영감


https://youtu.be/FEAIBWeaXr0

베토벤: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op.58

마우리치오 폴리니, 피아노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뛰어난 2인자의 설움
 다섯 곡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곡은 마지막 곡 “황제”다. 그럴 만하다. 괜히 황제란 제목이 붙었겠는가? 위풍당당하고 스케일 크고 강인하다. 그런데 이 황제 협주곡의 압도적인 포스 때문에 바로 직전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은 “2인자의 설움”을 숙명처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황제만 없었더라면 충분히 그 보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곡이기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담은 오래 전의 라이센스 음반들의 북클릿을 읽어 보면, “다음 협주곡 황제에 비해 절대로 과소평가할 게 못되는 곡”이라는 문구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문구는 글쓴이의 직무유기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과소평가할 게 못되는 곡 정도가 아니다. 저 유명한 황제 협주곡과 전혀 다른 독자적인 세계가 있는 걸출한 명곡이라 함이 옳다. 오히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이 네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황제를 능가하는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고전주의의 끝이자 낭만주의를 열어놓은 작곡가로 기억한다. 사실 설왕설래가 좀 있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낭만주의의 막을 올린 작품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를 뒤에 두고 포르테도 아닌 피아노로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독주부가 나올 때의 그 첫 감흥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전의 협주곡들은 어떤 곡이든 오케스트라가 어느 정도 운을 띄워놓은 다음 솔로가 등장하는데, 이 곡은 솔로부터 바로 나온다. 여기서부터 베토벤은 듣는 이의 몰입도를 한껏 올려주는 것이다. 진짜로 이 안에 뭔가 큰 게 있을 법한 기대감 말이다.

영감의 보고, 뮤즈의 직통계시
 그런데 의외로 이후로는 화끈한 발산은 드문 편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생각보다 상당히 작게 가져가면서 아기자기하게 엮어나가는 편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베토벤이 요구하는 다이내믹은 매우 섬세하다. 너무 우악스럽게 가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맥없이 가도 안 된다. 그리고 악보를 보면놀랍게도 스케일, 아르페지오, 반음계 등의 기본적인 피아노 테크닉들이 마치 하농처럼 도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장 좀 보태서 하농 연습곡 책에다 스피릿을 입혀놓은 느낌이다. 그런데 피아니스트의 입장에서는 악보가 스케일이나 아르페지오로 도배되어 있으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여기에 섬세한 다이내믹을 입혀야 하니, 피아니스트는 탄탄한 기본기는 물론이고 영적인 아우라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난곡인 것이다. 이 곡에 자신있는 피아니스트라면 적어도 음악성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다른 곡과는 극단적이랄 만큼 차별화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의 남다른 음악성. 그 근본은 무엇일까? 일단 베토벤의 당시 상황을 연상해보자. 이 곡은 베토벤 스스로 자신이 귀가 멀었음을 완전히 인정한 다음에 쓴 첫 곡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베토벤도 이제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완전히 내려놓고 쓴 곡이란 것이다. 내려놓은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끝없는 영감이었다. 하농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악보만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위에 입혀져 있는 영감은 신들린 듯한 포스를 위압적으로 풍긴다. 때문에 나는 이 곡을 “뮤즈의 은총”이라 일컫곤 한다. 만약 어떤 작곡과 학생이 이 곡의 기법만 따라해서 과제로 냈다고 상상해 보자. F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고? 베토벤이 투영한 신들린 듯한 영감이 없으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1악장은 아기자기하고, 2악장은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며, 3악장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다. 그런데 피날레의 그 기쁨은 방정맞게 날뛰는 기쁨과는 또 다르다. 깊고 깊은 성찰 끝에 얻어낸 해탈의 경지와 일맥상통한달까? 그래서 더 고귀한 기쁨이다. 보통 예술작품은 슬픔을 먹고 사는 법이다. 슬픔의 감정이 보다 더 많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쁨의 감정은 단순명료하다. 여기에서 예술성을 뽑아 내는 행위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한정된 소스 안에서 영적인 아우라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뮤즈의 은총”으로 모멘텀 삼은 곡이다. 완전히 멀어버린 베토벤의 청력의 빈 자리에, 뮤즈는 그걸 채우고도 남을 영감을 채워주었다. 이 곡을 완성할 당시의 베토벤의 나이는 36세. 그런데 이 곡은 끝이 아니다. 또다른 시작이다. 여기에 담아낸 베토벤의 반짝반짝 빛나는 영감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완숙미를 더해 갔다. 마치 예수의 서광을 몸으로 직접 경험한 순간의 사도 바울 같은 느낌이랄까?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그 사건에 비교할 만하다. 뮤즈를 예수에, 베토벤을 사도 바울에 대입해 본다면 말이다. 뮤즈의 영과 베토벤의 중심에 있는 영을 동시에 만나는 시간, 피아노 협주곡 4번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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