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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Nov 25. 2018

첫눈이 오는 날의 겨울나그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 남자의 판도라의 상자

https://youtu.be/CKQ-17OZiIw

슈베르트:연가곡집 “겨울나그네” D.911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바리톤

다니엘 바렌보임, 피아노


첫눈 오는 날에 만난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주말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창문에 가득한 성에가 기온이 대폭 떨어졌음을 말해 준다. 춥긴 추운 모양이다. 세수를 하고 휴대폰을 켜 보니 서울에 첫눈 소식이 들리고 타지역에 나간 지인들이 앞다투어 메신저로 첫눈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이날 아침의 내 기분은 그다지 좋지는 않다. 생각이 너무 많을 때 으레히 나타나는 두통이 날 꽤나 괴롭힌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집을 나서 차에 시동을 켠 다음, 슈베르트 겨울나그네를 틀었다. 이 연가곡집은 내가 우울할 때만 듣는 음악이다. 물론 곡 자체는 기가 막히게 좋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말년의 슈베르트의 내면 속 어두운 모든 것이 담긴 24곡의 연가곡. 그렇기에 너무 자주 들었다간 아무리 밝은 사람도 우울증 걸리게 만들 것 같기에.



심장이 100미터 아래에 파묻히는 느낌
 음악이란 예술분야에 있어서 대개 슬픔이란 예술품의 양념의 역할을 한다. 슬픔이 있으므로써 예술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겨울나그네는 다르다. 슬픔이 양념이 아니라 아예 메인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안주인 노릇을 해버린다. 단순히 눈물샘 좀 자극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만 딱 골라 빼서 100미터 밑으로 묻어버리는 것만 같다. 더군다나 규모도 정말 크다. 24곡이 무려 1시간 10분 내외로 CD한 장의 최대용량을 알뜰하게 꽉 채운다. 이것 뒤에 겨울나그네의 심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 B플랫장조까지 이어서 들으면 내가 마치 지하 몇 천 미터 아래 갱도에 있는 기분까지 느껴진다. 이 정도 되면 궁금해진다. 슈베르트가 입을 열어 말도 못 꺼낼 만큼의 그늘이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뭐가 그토록 말도 못할 만큼 어두웠는지.



느리게 걷다, 그리고 대화하다
 이 연가곡집을 구성하고 있는 곡상은 물론 다 다르다. 그러나 한 줄기로 간추릴 수 있는 내러티브는 명확하다. 슈베르트는 끝없이 걷고 있다. 그것도 느리게 혼자서. 걷고 또 걸으면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슈베르트와의 대화 상대다. 저 유명한 “보리수”처럼 길가에 있는 나무일 수도 있고, 사연 있는 듯한 작은 오두막집일 수도, 걷다 보면 나타나는 조그만 야생동물일 수도 있다. 이 연가곡집에 나오는 텍스트는 슈베르트와 동시대를 살다가 슈베르트와 비슷한 나이에 큰 명성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시인 뮐러의 시를 쓰는데, 슈베르트는 그런 뮐러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슈베르트도 살아생전에는 지금처럼 인정받지는 못한 작곡가였으니. 어찌됐든 슈베르트와 뮐러는 서로의 이름을 팔아 세상에 자신들의 이름 석 자를 알린 셈이다. 물론 그것이 두 사람 모두 죽은 다음에 이루어졌다는 게 너무나 슬픈 거지만.



죽을 때까지 간직한 그 남자의 판도라의 상자
 때로는 뭔가 너무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상황까지 오면 십중팔구 썩 유쾌한 내용이 아니다. 특히 관계에 관련된 것이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겨울나그네가 딱 그렇다. 입으로 꺼냈다간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한 꼴이 되고 마는 슈베르트의 이야기란 것이다. 슈베르트는 이 거대한 연가곡집의 초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 개인으로 놓고 보면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그가 직접 초연을 봤더라면 오히려 후폭풍으로 마음고생을 진탕 했을 수도 있기에. 이 곡을 듣는 사람에게도 다행이다. 누구나 판도라의 상자처럼 말 못할 치부가 있으니까. 음악이 내 마음을 공감해 주는 이 기능은 절대로 무시를 못 한다. 겨울나그네의 24곡은 그런 기능을 충실히 해낸다.


 첫눈이 오는 날에 듣는 겨울나그네는 참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심장이 100미터 지하로 파묻히는 느낌이 일단은 가장 강하다. 상당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 마음 안의 어두운 면들은 갖고 있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걸 싹 끄집어내서 실체를 알려주는 음악이 겨울나그네다. 싹 비워내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찌꺼기들을 모두 비워내고 밝은 것을 심장에 채워넣자. 추운 겨울이라고 어깨 축 처져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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