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유랑 - 25년 1월
40살의 나이에 아이 둘과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진 여자를 안다.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생인 연년생 아이들. 결혼을 늦게 한 터라 아이들은 아직 한참 어리기만 하다. 여자는 작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관찰 기간이다. 건강 상태 때문에 돈 버는 일은 할 수 없다. 함께 사는 시어머니는 환자다. 시아버지와는 오래 전에 별거하셨는데, 그도 연세가 많으셔서 하는 일이 없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의 남편은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새벽에 들어와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다시 새벽에 나가는 일이 잦았다. 직업 특성상 술을 많이 마시긴 했어도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가끔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저녁에 특제 낚지 볶음을 만들어주곤 했고, 주말엔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도 어린 아이들이 배에 올라타 뛰어놀면 곧바로 일어나 놀아주었다. 동갑인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미영씨’, ‘정연씨’라 부르며 존중했고, 그렇게 함께 아름다운 가정을 꾸렸다.
금요일 아침, “다녀올게”하고 출근했던 정연씨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실족사였다. 술을 곁들인 저녁 미팅을 마치고 회사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졌고, 이 과정에서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곧바로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두개골 함몰 등의 이유로 반나절만에 숨을 거뒀다. 올해로 막 40살이 된, 잔병 하나 없이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밤을 새운 미영씨는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정연씨를 떠나보내야 했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미영씨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으로 갔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텐데, 이런 식의 이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아빠의 죽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원래도 자주 보지 못하던 아빠를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다고 말해주기가 그리 어려웠다. 영정사진을 직접 들 수 없을 만큼 작고 어린 아이들이었다.
미영씨는 1년, 아니 2년 동안 집 안에 처박혔다. 먼저 떠난 정연씨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일 좀 적당히 하지, 술 좀 그만 마시지, 좀 더 조심하지… 끊었던 담배에도 다시 손을 댔고, 스스로는 물론 아이들도 잘 돌보지 못하고 방치했다. 시어머니가 그나마 아이들을 챙기면 실의에 빠진 채 가만히 보기만 했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을 땐 동네 뒷산에 올라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미로 속에 갇힌 듯한 나날이었다.
미영씨를 밖으로 꺼내준 건 대학 동창 현미씨였다. 현미씨는 미로 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들어왔다. 계속해서 안부를 물었고,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종종 찾아와 미영씨와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곤 했다. 친구의 헌신이 부담스러웠던 미영씨가 몇 번 밀어내자 현미씨는 말했다. “너는 내가 같은 처지였으면 안 그랬을 거야?” 미영씨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녀가 말하던 운동권 친구들간의 ‘의리’였다.
어느 한 날은 현미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경주에 놀러 가자고 했다. 미영씨는 그럴 힘이 없었지만, 애쓰는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 따라 나섰다. 현미씨도 미영씨처럼 아이가 둘이었다. 당시 넓은 들판이었던 경주 황룡사지에서 아이 넷은 온 세상이 자기들 것인양 신나게 뛰어 놀았다. 쏟아지는 햇살, 초록의 풍경, 따듯한 공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미영씨는 오랜만에 해방을 느꼈다. 정연씨의 죽음에서 벗어난, 일상의 존재가 다시금 미영씨에게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현미씨는 미영씨에게 마음 공부가 필요한 때라며 불교대학 입학금을 대신 내주며 배우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연씨의 죽음이 산업재해로 인정되었고, 몸을 뉘일 집도 한 채 있는 덕에 미영씨는 돈을 벌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마음 공부를 하고, 봉사 활동을 하며 미영씨는 조금씩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법문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수행을 이어갔다. 그리고 수행하며 배운 것들을 지침 삼아 아이들을 다시 돌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미영씨가 역부족을 느끼는 순간들은 종종 찾아왔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막막할 때 함께 의논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 그러했고, 학교나 학원에서 심한 말을 듣고 왔을 때 함께 대처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 그러했다. 본인이 다치거나 아프기라도 하면 당장 어떻게 할 지도 걱정이었다. 혼자 두 명 몫을 해내기 위해 점점 더 강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혼자는 아니었다. 미영씨가 힘에 부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도왔다. 함께 살던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당연했고, 아이들에게 아빠가 필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미영씨의 오빠나 아빠가 나타났다. 진학과 진로에 관해서는 정연씨의 직장 동료들이 조언과 도움을 주었고, 미영씨의 마음 상태는 친구들과 도반들이 계속 살펴주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미영씨와 아이들은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었다.
유독 안타까운 소식이 많이 들려오는 요즘, 미영씨와 아이들은 과거를 곱씹는 날이 많아졌다. 떠난 이는 다 정연씨 같고, 남겨진 이는 다 우리들 같다. 그래서 허망한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부의 냉혹한 말들이 더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미영씨에게 현미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있었듯, 그들에게도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 주변의 따뜻한 지지와 지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기에. 한 사람을 살아가게 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아이들까지도 올바르게 키울 수 있게 함을 알기에.
정연씨의 죽음으로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흔이었던 미영씨의 나이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마음 공부와 봉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에 급급했던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공부를 이끌 만큼 성장했다. 얼마 전에는 아이들로부터 독립해 서울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뤄내기도 했다. 꼬꼬마였던 아이들은 남부럽지 않게 잘 자라주었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자기 밥벌이를 할 줄 아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었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줄 안다.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지금이 퍽 만족스럽다고 정연씨를 영영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영씨와 아이들은 여전히 매년 기일과 명절이면 그를 찾아가 그리움을 표현한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에 대한 상상도 자주 나눈다. 상상 속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눈물이 날 때도 많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진 않으려 한다. 현실은 눈 앞에 있는 것이며, 정연씨와의 인연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계속 이어져 있다고 믿으니.
앞으로 미영씨와 아이들 앞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잘 견뎌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이들은 결국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연결된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고, 또 그들에게 힘을 나눠주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의 힘은 생각보다 위대하다. 서로에게 행복을 빌어줄 누군가가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