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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Nov 27. 2020

칠면조 없는 추수감사절

홍콩에서 보내는 우리 가족의 첫 추수감사절

 미국을 떠난 지 오래된 남편이 유일하게 미국식으로 챙기는 것이 있는데 바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11월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편은 들뜬 모습으로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느라 바빴다.


 내게 추수감사절이란 명절은 학창 시절 영어 교과서의 한 구석에 껴있던 미국 문화 소개란이나, 매년 시즌이면 나오는 미국 드라마 에피소드의 소재로 존재했을 뿐이었다. 이 명절 즈음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정도랄까. 반면, 남편에겐 모든 명절 중 이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다.


 결혼을 하고 인도계인 시댁에서 기념하는 명절이 뭐가 있으려나하고 인터넷으로 인도의 명절 달력을 보는데 세상에나. 지역별로 다르긴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명절이 있는 달도 있었다. 거긴 일 안 하고 맨날 노는 것인가! 나는 모든 명절을 기억하고 지낼 수는 없으니 서로에게 정말 의미 있는 명절 몇 개만 뽑아 '소수정예'스타일로 특별한 날을 축하하자고 제안했었고, 그때 남편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이 추수감사절이었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가족이 모두 영국 런던으로 옮긴 지 오래됐는데, 어째서 추수감사절이 가장 중요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미국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든가, 뭔가 심오하고 고차원적인 이유를 기대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의 이유인즉, 어릴 때 런던에 있는 미국 국제학교를 다녔는데 추수감사절이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가는 날이 었다는 것. 이 날은 영국에선 명절이 아니기에 영국 학교를 다니는 그의 친구들은 학교에서 공부해야 했지만 본인은 자유롭게 놀 수 있어서 그 날이 가장 좋은 날이 되었단다. 참으로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유지만 어쨌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라 하니 안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수감사절하면 아마도 오븐에 구운 칠면조, 옥수수, 으깬 감자, 크랜베리 소스, 호박파이 정도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 추수감사절 음식엔 칠면조가 없다. 추수감사절이 제일 중요하다고, 양보할 수 없는 명절이라고 했으면서 정작 칠면조 없는 추수감사절이라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남편의 커뮤니티(라고 부르지만 인도의 카스트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는 채식을 하는 커뮤니티다. 그가 단백질 때문에 고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거의 서른 살이 다 되어서기 때문에, 그전까지 그는 으깬 감자와 옥수수, 스터핑, 파이가 주인공인 추수감사절을 보냈다. 이젠 남편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 주인공으로 닭을 섭외했다. 어차피 전통적인 칠면조 구이를 할 통 칠면조도 아닌 것, 내 마음 가는 대로 요리해봤다. 원래 가족 전통이란 게 다 이렇게 누군가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그것이 이어지면서 '전통'이 된 것일 테니.


 두툼한 닭가슴살을 팡팡 두들겨 얇고 연하게 한 후, 소금과 후추, 약간의 오레가노로 간을 한 후 가운데에 치즈와 바질 잎을 넣고 둥글게 말았다. 닭가슴살을 오븐에 구우면 퍽퍽해지기 쉬우니, 파마햄으로 골고루 덮이게 돌돌 한 겹 더 말아 올리브유를 바르고 오븐에 구웠다. 파마햄에서 나오는 기름의 고소한 냄새 덕에 요리는 아직 반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배는 꼬르륵 거리며 아우성. 스터핑도 빵부터 전부 만들 생각이었지만, 오늘은 병원에 다녀와 시간이 없기도 했고 감기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간단히 시판용 믹스를 둥글게 말아 오븐에 굽는 것으로 해결했다. 오븐에 뭉텅뭉텅 깍둑 썰기한 감자도 굽고, 삶은 감자에 옥수수를 넣는 내 방식의 으깬 감자도 만들었다. 내가 으깬 감자를 만드는 사이, 남편은 어제 그램 크래커로 준비해뒀던 베이스 위에 부드러운 고구마 퓨레를 만들어 올리고, 피칸을 구워 잘게 다진 후 장식했다. 미국식이라면 마쉬멜로지! 하며 마시멜로까지 위에 덮어 오븐에 구워내니 제과점에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고구마 피칸 파이가 완성됐다.

치킨과 감자
디저트

 준비한 음식을 접시에 담고, 둘째를 재우고 있던 헬퍼도 불렀다. 이미 저녁밥을 먹은 첫째를 식탁에 다시 앉혀 고구마 파이를 조금 주니 어른들 잔치에 꼈다는 성취감에 신이 났다. 아까 오후에 시원하게 준비해 둔 리슬링 와인도 꺼내고, 어른 셋이 만찬을 즐겼다.


 옛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힘들게 고생을 하고 첫 수확을 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원주민들과 함께 칠면조 고기와 옥수수를 나눠 먹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칠면조가 아니라 오리나 거위였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족이 모이고, 감사한 사람도 함께 하는 자리, 칠면조든 오리든 메뉴가 뭐가 중요할까 싶다. 푸짐한 음식에 몸이 따뜻해지고 눈을 마주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둘째가 태어나 우리 가족이 완전체로 홍콩에서 맞이한 첫 추수감사절, 칠면조는 없었지만 즐거움은 넘치던 날이었다.


 Happy Thanksg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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