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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Sep 23. 2021

씁쓸했던 송편

미안해. 이제 송편 사러 가지 마.

 홍콩에서 맞는 두 번째 추석. 작년엔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나, 이제 둘째도 조금 컸으니 올해부턴 우리 가족 나름의 추석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유치원에서 중추절 이야기도 배우고, 랜턴도 만들고,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등원해서 놀고 오는 아이가 중국의 명절만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에 더더욱.


 '추석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송편이니까 일단 송편을 준비해보자!'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보니 나도 따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습식 쌀가루를 구하지 못해서 도전은 내년으로 미뤘다(라고 쓰고 포기했다 라고 읽는다.)


 "추석엔 송편인데... 애들이 송편이 뭔지도 모르고 자라게 될 거야. 우리 애들은 나와 너무 다른 명절 문화를 경험하고 있어. 결국 나는 자식과 명절을 공유하지 못하는 그런 전형적인 이민자 엄마가 되겠지..."


 며칠 내내 이렇게 꿍얼꿍얼 대는 나를 보고 결국 남편이 송편을 사러 다녀왔다. 20개에 100 홍콩 달러. 한 주 먹밖에 안 되는 양이지만 그래도 바로 만든 송편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하다. 송편 없이 외국에서 보낸 추석이 15년이 넘었으니 홍콩의 이런 편리함에 놀란다.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며 둥글둥글 윤기 자르르한 자태를 뽐내는 송편을 보고 감격에 젖었다. 이제야 추석이라는 게 실감 났다. 흰색, 분홍색, 녹색 셋 중에 골라 한 알 입에 넣어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깨소 송편이다. 꿀맛이라고 감탄하며 활짝 웃는 것으로 남편에게 감사 표시를 하는데, 남편이 떡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떡집 안에 들어온 남편을 보자마자 주인이 한국말로 다른 이에게 "배달인가?"라고 했단다. 딜리버루나 푸드 판다 배달원 말이다.


 "아뇨. 배달 아니에요. 떡..."


  "살려고?" (떡을 살거 아니면 떡집에 왜 왔겠습니까?)


 남편이 한국어로 떡을 골라서 사고 나자 "한국말 잘하시네~"라고 했단다. 아마 민망하니 그랬을 것이다. 보통 내 남편 외모를 보고 자신들 마음대로 상상을 하고 이 사람을 자기들이 아는 어떤 카테고리에 자동적으로 넣어버린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예측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한국말 잘하시네요~"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칭찬을 하는 행위로 자신들이 어떤 잣대로 이 사람을 평가했는지를 가리려는 듯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맛있던 송편이 갑자기 입안에서 씹히는 돌 마냥 우르럭 거렸다. 추석 하루 전에 기분을 아주 제대로 망쳤다.


 배달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다른 직업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서, 내 남편을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다. 떡집 주인이 가게에 온 남편의 외모 하나만 보고 자연스럽게 어떤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 추정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홍콩엔 남아시아, 서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그중엔 음식 배달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내 남편은 인도계 미국인이라 외모가 남아시아인이다. 떡집 주인이 남아시아 배달원만 봐왔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남아시아인 외모를 가진 사람을 배달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실제로 그쪽 사람들이 배달을 많이 하잖아.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럼 배달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로컬 홍콩인. 그런 동아시아 외모를 가진 사람이 가게에 와도 떡집 주인은 첫마디로 "배달?"을 내뱉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가게에 찾아오는 사람을 보면 일단 손님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나는 어느 가게에서도 배달원으로 오인받은 적이 없다.


 한국인(처럼 생긴 동양인)이 아닌데 추석에 떡을 사러 오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으니까 배달로 추정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게 반문한다면 난 묻고 싶다. 그렇다면 남아시아인이 아닌 백인이 왔어도 그 주인이 배달원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다. 백인하면 끔뻑 넘어가는 홍콩 분위기 상, 백인 외모를 보고 엘리트 전문직으로 상상을 했으면 했지, 배달원으로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홍콩에 백인 외모를 가진 딜리버루 배달원이 한 명도 없는가? 그건 아니다. 나도 만난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겪은 것, 만나본 사람들을 기반으로 어느새 서랍장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마치 도서관 열람실 자료 찾을 때처럼, 대분류에다가 소분류까지 해서. 어쩌면 이게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 프로세스일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제 보니 지금 이 사람도 그런 스타일인가 보네.' 하면서 그 사람을 잘 알기도 전에 어떤 서랍장으로 넣어서 분류하고, 그 카테고리 대응 방법에 따라 그 사람을 대한다. 그렇게 편견이 생기는 거겠지. 물론 그게 맞아떨어질 때도 있지만, 너무 서둘러 서랍장에 넣어버리면 틀릴 확률도 높아지지 않을까? 나는 누군가를 너무 성급히 어떤 서랍에 넣어버리고 싶지가 않다. 물론 다른 사람도 나와 내 가족을 빛의 속도로 서랍에 넣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신의 명절도 아닌데, 나와 아이들을 위해 한 시간 거리, 처음 가보는 곳으로 송편을 사러 가서 겪은 것이 이렇다니. 남편은 자기는 이나라 저나라에서 이런 것쯤 하도 많이 겪어서 괜찮다고, 이럴걸 예상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더 미안했다. 북미에서든,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 흰 피부를 가진 동아시아인 여자가 살아가는 세상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내가 먹고 있는 이 송편도 그만큼 씁쓸하다. 내년부터는 송편 만드는 법을 배워 집에서 내가 만들어야겠다. 미안해서 남편에게 송편 사러 또 다녀오라고 할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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