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다움과 무례함

by 유랑

이 정도면 나름 한산한 버스였다. 투명한 창을 통과해 내리쬐는 오후 2시의 햇볕은 잠시 겨울을 잊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무선 이어폰 연결이 끊겼다. 오랫동안 충전을 해놓지 않은 탓이다. 그게 마냥 싫지는 않았다. 주변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릴 때 나는 약간 나른했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앞에는 젊은 아빠가 어린 딸을 무릎에 올리고 앉아있었다. 젖살이 포동한 아가는 많아봤자 네다섯 살처럼 보였다. 아빠가 앞으로 가방 메듯 딸을 마주 안고 있었으므로 이따금씩 나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작은 박새처럼 생긴 아이는 내내 종알거렸다. 아이가 지저귈 때, 아빠는 가만히 듣다가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 목소리는 봄 같았다. 부녀가 있는 자리는 포근했다. 나도 덩달아 훈훈했다.


어느 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학생들이 무더기로 타는 바람에 버스는 혼잡해졌다. 대부분 중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조용했던 버스가 어린 학생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버스가 덜컹일 때 남학생 몇몇은 서로에게 농담 섞인 욕지거리를 주고받았다. 한 여학생은 함께 탄 남학생과 술담배 얘기를 자랑스레 늘어놨다. 그들 모두가 나와 내 앞에 있던 부녀 곁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빠에게 재잘대던 아이는 말을 멈췄다. 아이가 말을 멈추자 아빠도 입을 닫았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선명해서 이어폰을 끼고 있었음에도 잘 들렸다. ‘나도 저랬으려나’ 곰곰이 생각했는데, 답은 ‘버스에서 저러지는 않았다’였다. 왜냐면 나는 학창 시절에 버스를 거의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저 시기에는 저렇게 행동하고 표현하는 것이 소년답다. 숨김없이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이 필요한 나이다. 객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지게 돼 있다.


내가 학창 시절의 추억에 조금 빠져들 때쯤, 학생들은 내릴 준비를 하는 듯했다. 네다섯 되는 남학생들의 대화가 오고 갔다.


"어디서 내리냐."

"여기냐."

"아 시발 아닌가, 다음인가."


그러다 한 학생이 갑자기 벼락같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어디서 내릴 건데 시발놈아! 니네 엄마 자궁에서 내릴 거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버스에 울려 퍼졌다. 아마 많은 이들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움찔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오직 학생들만이 대수롭지 않은 듯, 킥킥대며 웃었다.


기분이 언짢았다. 그 말을 뱉은 학생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키는 170 중반으로 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나름 순진한 인상이었다. 친구들을 웃겼다는 성취감 때문이었는지 그 녀석은 친구들을 따라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웃음 때문에 자연스레 이빨이 드러났는데, 거기엔 그의 부모가 해줬을 교정장치가 부착돼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학생들은 곧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문이 닫힐 때, 버스 뒤편에서 끌끌대며 혀를 차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버스는 다시 고요해졌다. 묘한 분위기 속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거기 있던 학생들의 얼굴을 나는 전부 훑어봤는데, 그들 모두가 평범한 인상이었다. 일진 같은 부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별일이 없다면 그들은 무탈하게 성인이 될 거고, 글자 그대로 평범하게 살아갈 것이다. 웬만하면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무심하게 생각하려 해도,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아이는 여전히 아빠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아직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는 꼼짝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창밖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묘했다. 마치 둘의 관계가 바뀐 듯했다. 아빠가 아이를 안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아빠를 안고 진정시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내릴 때까지 둘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몇 분 뒤, 집 앞 정류장에서 나는 내렸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내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왠지 모를 착잡한 마음에 걸음이 늘어졌다. 그 작은 아이의 눈동자가 자꾸 눈에 밟혔고, 돌처럼 굳어버린 아빠가 왠지 서글펐다.


호기심 많은 아이는 집에 가서 아빠에게 혹시 그 말의 뜻을 물었을까. 그랬다면 아빠는 아이에게 뭐라고 대답해 줬을까.


소년다움과 무례함, 그 사이의 경계는 이제 거의 사라져 버린 듯하다. 학교, 공공장소, 길거리에서 소년들은 겁이 없다. 소년들은 이제 어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치 빠른 어른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소년들의 곁을 그저 조용히 지나친다. 자신들의 권위가 붕괴됐다는 씁쓸한 현실을 인정하며 말이다.


언제부터 어른의 지위가 이렇게까지 곤두박질치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소년일 때, 나도 어른에게 반항했고 이유 없이 그들을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는 어른의 권위가 확실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권위에 도전하며 그들이 정한 질서 밖으로 탈출하려 부단히 애썼던 것인데 결국, 바깥으로 튕겨나간 적은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변 어른들이 나를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나는 반항아였고 객기 가득한 철부지였지만 내 행동은 소년다운 선에서 용납될 수 있었고, 그 선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 사이에 소년들은 소년다움을 잃었고 어른들은 어른다움을 잃었다. 어른들은 소년들을 더이상 붙잡지 못하고, 소년들은 어른들의 권위를 종잇장처럼 가벼이 여긴다. 버스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에 너무 과한 의미부여를 하는 게 아니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저 하찮게 넘길 일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 또한 무기력한 어른이자 방관했던 관찰자였다는 점에서 부끄러움도 느낀다.)


아들의 이빨을 교정해 준 부모는 알까. 자기 아들이 버스에서 어머니의 자궁에 대해 얘기했다는 사실을. 그 학생은 설마 몰랐을까. 버스에 어머니뻘 되는 사람들과 조부모뻘 되는 어르신들이 많이 타고 계셨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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