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공유 Sep 09. 2019

흰 머리카락

  시작은 흰머리 세 가닥이었다.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는 기다란 전신 거울 앞에 내 모습을 훑다가 얼굴에서 머리로 시선이 올라간다. 바로 이마 위에 한가닥 나는 흰머리가 약간 황금빛 이 돌길래 왠지 뽑고 싶지 않아 늘 거울을 볼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했었다. 그날은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 한가닥부터 시선이 가르마를 따라 정수리까지 가는데 한가닥, 두 가닥, 세 가닥. 정확히 세 가닥이 모여있는 걸 보고 놀라서 통화하던 신랑한테 말했다.

“나 흰머리가 모여서 났어. 노화의 시작인가...?”


  20대에 어쩌다 한 개씩 보이던 새치와는 다른 30대 중반의 흰머리카락. 웃을 때 생기는 기다란 눈가 주름에도  ‘ 괜찮아, 그냥 곱게 늙자.’  하던 나였는데 이번에 발견한 흰머리카락은 고생한 흔적 같아서 씁쓸해진다.

  



  오전에는 각별하게 생각하는 조카의 사법고시 발표일이었다. 잘 보았다고는 했는데 혹시나 떨어졌을까 싶어 확인 전화도 선뜻 못하고 있었다. 다시 공부를 하게 되면 한 학기 등록금은 꼭 내줘야지라고 결심했었기에 얼마 동안 돈을 모아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점심에는 아빠가 가입한 보험 때문에 보험사 직원과 실랑이를 했다. 나이 많은 아빠한테 텔레마케팅으로 보험을 가입시키다니, 내가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저녁에는 글 쓰기 수업이 있어서 음료를 사러 마트에 들렀다.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손에 우산을 든 채 비를 맞으며 걸을 만큼 진이 빠져있었다. 차에 앉아 백미러를 보며 되네었다  

‘아, 인생은 왜 늘 걱정 투성이 일까.’




  글쓰기 수업이 시작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후끈한 피드백을 마치자마자 카톡이 와서 확인해 보니 오빠다.

‘방금 규니 토 완전 많이 했어.’ 차를 예열할 틈 없이 곧장 집으로 갔다.



  

  걱정하던 나와 달리 시어머니와 신랑은 밝게 웃으며 날 맞이했다. 아이는 목을 가리키며 웩했다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귀엽고 안쓰럽기도 해서 꼭 안았다.

며칠 전 아이가 높은 침대에서 떨어져서 구토를 했다. x-ray를 찍고, 며칠은 유심히 살펴야 하는 중에 또 구토를 해서 이번에는 CT를 찍어야 하나 걱정하며 달려갔었는데 그날따라 시어머니가 규니에게 많이 먹였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다음날 오빠는 어머니를 댁에 모셔 드리고 와서는 소파에 앉아 말한다.

“외삼촌 건강이 더 악화됐대. 손을 전보다 심하게 떨어”

거기까지 듣는데 내 마음속에서 든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갈수록 더 안 좋아지네...”

그 말에 나도 놀라서 “일찍 잘게.” 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그날 밤 천정을 보며 갖가지 생각들에 금세 우울해졌다. 결혼을 한 이후 나는 어두워졌다. 염려할 일이 많아졌다.



 결혼하기 전 늘 신랑에게 하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결혼 하기 전의 삶보다 결혼 후의 삶이 나아지질 않을 거라면 굳이 결혼하고 싶지 않아.

아빠도 퇴직은 했고 나는 더 늦게 결혼하고 싶어.”

  이렇게 말하면 신랑이 엄청 쫓아다닌 줄 알겠지만 사실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우리는 결혼 준비를 했고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듯 정신 차려보니 식장에 있었다.

큰 준비와 계획 없이, 나를 챙기는 것도 버거운 미성숙한 인간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른의 일상으로 젖어들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시댁과 친정을 찾았고, 또 그러지 않은 어떤 주말엔 시어머니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친척 행사에 참석했다. 내가 책임지고 옷을 빨아 입히고 먹여야 하는 자녀가 생겼으며, 이제는 양가 부모들의 건강을 염려해야 하고, 집의 가장인 신랑의 안위를 늘 걱정한다. 시누이와의 관계도 가끔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아주버니의 미래를 걱정한다. 물론 이 부분은 오빠의 말에 의하면

  “고여사가(시어머니애칭) 형 먹고 살 거 다 챙겨 놓고 세상 뜰 것이니 우리는 신경 안 써도 돼.”

 라고 하지만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챙겨야 할 것이 많아졌다.


같은 30대의 시간인데, 결혼 전과 후의 나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처녀 때는 명절이고 경조사고 참석한 적이 없고 편한 데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던가, 졸리면 잤는데.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훨씬 많아졌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흰머리가 결혼해서 생긴 걱정들 때문이라고 생각할까?

결혼을 안 했어도 내 나이는 37살일 것이고 중력과 싸우고 있었을 것인데, 결혼을 안 했으면 반대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그 나름대로 언제 결혼하고 아이 낳냐며 고민하거나, 혹은 연애에 치이고 있거나, 직장에 휘둘리며 날 돌아보지 못하고 있거나 각자 자리에서 저마다의 걱정을 하고 살고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반대로 결혼해서 오빠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다고 좋아했던 적이 있기도 하지 않았던가?

흰머리 세 가닥에 참 생각이 많아진다.

이전 02화 관계의 밀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