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다 보면, 솎아 낼 수 있게 되.
“윤희는 마음이 참 여려.”
어릴 적부터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 저 뜻이 정확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늘 들어왔던 말, ‘여리다’는 단어가 주는 유약함이 꽤 마음에 들어 거부감 같은 건 가진 적이 없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며 점점 단단해져 갈 때 즈음 저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지인들은 나를 '유리알 멘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감정의 낙차가 심하다. 좋아하는 폭도, 슬퍼하는 폭도 크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라 하면, 모든 일에 의연하고 쿨하게 대처하는 여유로운 호인의 모습이랄까? 누군가의 말투 하나, 시선 하나, 행동하나 하나에 예민한 안테나가 발동을 한다. 그렇게 날을 세워 사람들과 만남을 지속하다 보니 늘 기진맥진하고 영혼이 소진되는 기분이 들었다.
20대를 그렇게 흘려보내고 37살을 바라보게 되자그간 쥐고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놓게 된다.
쥐려는 것 또한 욕심이니까.
내 마음 먼저 알기, 내 감정 주시하기로 나를 챙기려 한다 .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해 내 감정을 무시하던 일들을 내려놓기 시작하자 오히려 인간관계의 밀도가 높아졌다.
동생 연희와 지애는 내가 소개해준 사이다. 연희가 다니던 회사에 염증을 느끼고 돌연 ‘언니처럼 살고 싶으니 비서를 하겠다’며 비서직으로 이직을 했다. 마침 그곳에 지애가 다니고 있었기에 연희를 잘 부탁한다며 둘을 소개해주었다. 둘은 나 없이도 잘 만나며 친하게 지냈다. 1년 뒤, 지애는 신랑과 함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에 들어오면 꼭 보자던 말을 전하고는 SNS로만 근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연희와 나는 내 출산 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언니 힘들어 보인다.”
나를 걱정해서 해 준 말이었겠지만 그 말 하나 가 내 마음에 훅 꽂혔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만에 만나서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내 체격은 커졌고 연희와 근황을 나눌 새도 없이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아이를 재우려 차로 이동을 하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 생각과 다르게 연희는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물론 집중 못하는 시간이 그녀도 많이 지쳤으리라. 미안함과 서운함이 겹쳤고, 많은 생각이 나를 감쌌다.
도태된 기분이 들었다. 덩치 큰 아줌마로 전략한 기분이었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날 보는 연희의 눈빛에 측은함이 가득했다. 각종 영양제를 입에 털어 넣는 날 보는 눈빛과 그날의 공기는 내게 상처를 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동생 지애가 한국에 들어와 내게만 연락하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한국에 나와서는 연희를 만나는 걸 확인했는데 내게만 연락을 하지 않다니, 서운함을 담아 지애에게
"보고 싶다, 나 안 보고 갈 거야?"는 카톡을 보냈다. 답이 없었다.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았다.
조금 다그치자 바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지금 시댁에 있는 상황이라 심적으로 힘들고, 약속이 있어 나갈 준비 하느라 답을 못한 건데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냐 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을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너 어쩜 사람 진심을 무시하느냐며 화를 냈다.
그때 돌아온 한마디
“아,,, 그럼 이번 주에 연희 만나기로 했는데, 언니도 그때 나오던가.”
그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갔다. 나이를 다 떠나서 인간관계에서 무례함이란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내 얼굴에 대고 욕 덩어리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이 아이의 진심임을 확인하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런 대우를 받으며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에 화났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국에서 즐겁게 지내라 인사하곤 끝을 맺었다.
우리는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연희도 알고 있었을 터. 그 둘은 내게 약속이나 한 듯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둘에게 느낀 건 배신감이었다.
며칠동안은 눈이 시큰했다. 관계를 망쳐버린 게 나인지 그 아이의 무례함인지 헷갈렸고, 더는 그런 것들을 참지 않기로 해서 내가 결정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며칠간은 먼저 연락 오지 않을까? 전화를 들여다 보기도 했고, 한국에서 이 일로 기분 망치게 한건 아닌가? 이렇게 사이를 틀어버릴 만한 일이었을까? 하는 갖은 생각들로 맘이 괴로웠다
속 없이 요즘도 종종 그녀가 떠오른다. 그러나 어그러진 관계를 자국 없이 빳빳하게 펼 수는 없다.
미주 언니는 유머러스해서 같이 있으면 재미는 있었는데 반해 입이 거칠어 상처 받는 말을 사냥개처럼 퍼붓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말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상황도 자주 있어서 그녀를 만나고 오면 며칠 동안은 힘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싫은 말 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전화로만 안부를 물으며 인연을 유지했다. 언니는 차로 이동시 내게 전화를 해서는 자기 할 말만 다 해놓고
‘야, 나 도착했어. 이용가치가 끝났다. 끊어.’ 하는 식이었다.
지금 나는 그녀의 모든 연락에 응답하지 않는다. 언니는 내가 연락을 피한다며 화를 내기도 했지만, 점점 거리를 두었다. 그럴때마다 동생 지애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쩜 내가 모르는 동생의 분노가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았던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교롭게도 동생 지애와 연희는 “언니는 이제 다 가졌네, 언니처럼 살고 싶다. ” 라던가
미주 언니는 딸을 낳고 나서 내게 “너처럼 키울 거야.”라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었다.
저 말을 들었을 때는 ‘아, 그래도 인생을 잘 살았나 보다. 누군가는 내 삶을 부러워하니 말이야.’ 하며 으쓱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꼭 선망은 아니었구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10년을 같이했던 우정을 정리하면서 한 달 정도는 힘들었던 것 같다. 보고 싶고 연락하고 싶어 술을 마시면 폰을 꼭 쥐기도 했다. 물론 끝끝내 번호를 누르지는 않았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례함을 당연히 여기던 그들에게 더 이상을 허락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며 내 마음을 지켜낸 것이 기특하다. 요즘은 성향이 맞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인간관계의 깊이가 깊어졌다. 비워야 담는다고 하듯이 더 좋은 사람들을 담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의외로 깊지 않았던 사이가 사소한 계기로 깊어지기도 했다. 애림 언니는 집에 가면 집밥을 차려주는데 나는 그때 그녀의 말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육아하다 보면 남이 차려준 밥 먹고 싶잖아. 아이 내가 봐줄게 너 천천히 밥 먹어.”
사람 사이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는 것 같다. 언니는 마음을 보여주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나 또한 귀하게 여긴다.
호의를 당연히 여기는 예의 없는 모든 것이 지치는 요즘, 사람 입이 백지장 같이 가벼워 날이 서기는 얼마나 쉬운지, 칼처럼 베이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묵직한 말이 가벼운 가십이 돼버리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보다 이제는 같이 있으면 마음 편한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더 소중해진다.
‘모두에게 좋은 친구인 사람은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허겁지겁 먹은 음식은 체하듯 급하게 이루어지는 우정은 가벼운 일들에도 언제 우정을 나누었냐는 듯 흔들릴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 그런 것들까지 다 쥐고 있으려던 것 또한 욕심 때문이니 이제는 애쓰지 않고 살아야지.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괜찮을 테고 굳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물 흐르듯 좋은 인연은 늘 곁에 남는 걸 확인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