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정찬 즐기기
단정하지만 몸매가 드러나는 러플 드레스를 입고 레이스 장갑을 끼고 엔틱 구슬이 달린 작은 클러치백을 들고 우아하게 걸어 들어온 한 여성이 눈을 반쯤 치켜뜨고 자리를 확인한다. 옆 테이블엔 영국 신사인지 턱시도우를 빼입은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있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다른 한편엔 중년의 여성들이 올드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와인잔을 맞대고 화통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나 나올 법한 크루즈 다이닝 테이블에 대한 나의 상상은 그랬다. 적어도 처음엔 말이다. 유치한 상상 앞에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덤으로 따라오는데 그래서 고민을 참 많이 했더랬다.
럭셔리 여행으로만 생각하는 크루즈에서 정찬을 즐기려면 어떤 복장으로 가야 하지? 정장을 입지 못하면 입장 거부되는거 아냐?
물론 매일 다른 드레스 코드가 있다. 하지만 여행객을 생각한 일반적인 크루즈에서는 '타이타닉'에서 처럼 계급도 고난도의 포멀한 드레스코드는 묻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제의 드레스 코드는 캐주얼(Casual)이었다.
6:30 pm 갈레온(Galeone) 레스토랑
*드레스 코드: 60's, 70's, 80's (나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우리 집 남자들은 편안한 차림으로 등장)
5 Deck에 있는 갈레온으로 내려갔다. 어제와 같은 테이블 번호 514번. 오늘이 두 번째 정찬 디너이다. 크루즈에 승선하는 첫날 카드를 발급받는데 카드 아래에 정찬 서비스를 받을 식당이름과 테이블 번호가 적혀있다. 크루즈 승객들이 많기 때문에 두 개의 레스토랑에서 각각 6시 30분과 8시 45분에 두번의 정찬 식사가 진행되고 원하는 식사 시간은 크루즈 예약 때 결정하면 된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린 편이고 술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 시간인 첫 번째 디너 테이블을 예약했다. 물론, 정찬 식당에 가지 않거나 예약한 시간을 놓쳤다고 해서 저녁을 먹지 못하는건 아니다. 정찬 레스토랑의 경우엔 예약시간 15분이 지나서 나타나지 않으면 자동 취소가 된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웨이터에게 살짝 부탁을 하면 빈자리가 있는 경우 다음 식사시간 8시 45분에 코스요리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레스토랑에서의 코스 요리가 부담스럽다면 11층 뷔페식당에서 캐주얼한 저녁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큼직한 원형 테이블 위엔 물과 와인을 위한 두 개의 글라스와 식전 빵을 담을 20cm 플레이트, 그리고 그위엔 리넨 냅킨이 놓여 있다. 오른쪽엔 애피타이저를 위한 포크와 나이프가 그리고 왼쪽엔 수프를 위한 스푼이 놓여 있다.
담당 웨이터와 서브 웨이터 디저트 웨이터까지 3명의 크루들이 우리를 전담해 서비스해 준다. 남미에서 온 듯한 체구가 좋은 웨이터가 와서 인사를 한다. 곧이어 인도에서 온 서브 웨이터 마리오씨가 다양한 식전빵이 담긴 반짝이는 실버트레이를 내민다.
"어떤 빵으로 드릴까요?"
통밀로 만든 동그란 빵 '보콘치니', 연필처럼 가는 막대모양의 '그리씨니', 그리고 풍미가 강한 '포카치아'. 향긋한 밀냄새가 진동하는 유럽의 빵들이 나는 너무 좋다. 그 중 우리 가족의 인기 빵은 언제나 '포카치아'였다. 난 살이 찌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매번 "Small one please~"를 외쳤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 One more please~"를 조용히 속삭였다.
빵을 먹으며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메인 웨이터 대니씨가 " 오늘은 와인 한잔 하시겠어요?" 묻는다.
"베네치아에서 기분 좋게 여행했는데 좋은 추억을 위해 자기 한잔 해요.~~"
"그래, 오늘은 와인 한잔 할까? 자기는,,,?"
"난 괜찮아." 신랑은 사양한다.
크루즈에서 모든 식사가 무료이나 미포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알코올과 음료'였다. 물론, 기본 물과 아메리카노, 우유, 주스( 조식 때만 제공)는 무료로 서비스된다. 하지만 그 외의 술 종류나 제조커피( 라테나 카푸치노등), 칵테일등은 따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첫날 음료 패키지를 구매할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생각보다 비싸고 패키지를 구매하면 욕심부려 더 많이 마시게 될까 봐 구매하지 않았더랬다. 가끔 마시고 싶을 때마다 비용을 지불하기로 하고 말이다.
나는 웨이터에게 레드와인을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러자 웨이터가 하는 말 "하우스 와인은 패키지에 포함인데 남편분도 한잔 하시죠?"
"에엥?"
어제 분명히 패키지 구매를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말이지?
지금이라도 구매하라는 말인가?
다시 물어보았지만 웨이터는 우리가 이미 '음료 이지패키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신랑이 이마를 탁 치더니 하는 말,
"생각났다. 1월에 크루즈 예약할 때 프로모션 행사가 있었는데, 와이파이와 음료 패키지 중 선택하는 거였어. 그때 음료 패키지를 선택했네???^^:; "
아뿔싸! 그런 줄도 모르고 어제 하루 고민만하고 마시고 싶었던 라테도 참고, 아이들도 아이스티 마시고 싶다는걸 한병만 주문해서 나눠마시게 하고 엄마의 '짠내'모습을 보여줬는데 어차피 다 무료였다니 이미 지나간 하루치 무한리필 음료들이여~
"그래도 지금이라도 정확히 알게 되 다행이네"
"대니씨 여기 와인 두 잔 부탁해요~~"
그러자 웨이터가 재미있는 미소를 짓는다.
그 후 우리는 매 식사 때마다 원하는 만큼 와인과 탄산수, 아이스티를 마시고 매일 아침 난 환상적인 이탈리아 카페라테를 마실 수 있었다.
*우리가족이 이벤트로 누렸던 무제한 음료 Easy Package*
-생맥주, 하이네켄
-하우스 와인
-클래식 칵테일
-혼합음료 및 무알콜 칵테일
-탄산음료 및 과일 주스
-생수병과 탄산수
-따뜻한 음료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카페라테, 티)
베네치아에서 사실상 점심을 거르고 왔기에 코스 요리지만 많이 먹고 싶다. 코스별로 하나씩 고르는 게 기본이지만 처음 주문할 때 옵션을 두 개씩 선택해도 모두 다 맛볼 수 있다.
사실 난 좀 창피했다. 그냥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하나씩만 주문해도 충분히 배부른데 우리 집 남자들 두 접시씩 골고루 시키는데 어찌나 부끄러운지, 모든 한국 사람들이 대식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지 괜한 걱정도 들었다. 다행히 웨이터들은 잘 먹는 우리 집 식구를 보고 항상 재미있는 미소를 지어 주셨다.
애피타이저가 끝나면 접시와 커트러리를 바꿔준다. 메인과 디저트도 마찬가지다. 집에서야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던 수저가 전부이고 가끔 포크와 나이프가 등장하지만 이렇게 근사하게 차려주는 밥을 매일 받아먹고 있으니 집사람으로써는 정말 '환상적인 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확실히 msc 음식 퀄리티가 좋아졌다. 지난 서유럽 지중해 크루즈 때 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인데 특히 다양한 스테이크 종류와 리조또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매일 바뀌는 메뉴들은 저녁 정찬 시간을 기다리게 만들었고 우리 가족 모두를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정장슈트와 보타이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정말 맛있게 깨끗하게 먹어주는 가족이었다. 아마도 웨이터도 그런 우리가 분명히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