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에서 운동하기
일반적으로 밤새 항해한 크루즈는 아침 무렵 다음 기항지에 도착하지만 베네치아에서 브린디시라는 항구도시까지 거리가 상당한 지 오후 4시에 도착 예정이다. 물론 육로에서 차를 이용해 간다면 9시간이 걸리고 비행기를 이용한다면 2시간도 안되어 도착하지만 바닷길로 밤새 항해하는 매력은 분명히 남다르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으니 해가 긴 여름에야 상관이 없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5시면 어두워지는 유럽에서는 아쉬움이 큰 건 사실이다. 배안에서도 놀거리가 많아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위안을 삼고 알차게 보내보기로 한다. 기항지에 늦게 도착한다고 늦잠을 잔다거나 아침을 거르거나 하는 일은 내 사전에 없다. 근면성실은 여행 와서도 이어지는 것이니까.
크루즈에서의 선실은 따뜻하고 아늑한 내 집과도 같다. 13 sqm(약 4평)의 작은 방 한 칸과 겨우 설 수 있는 샤워부스와 변기, 세면대가 있는 욕실이 전부지만 일주일 동안 살기엔 더없이 충분하다. 가끔 여행을 하다 보면 한없이 미니멀하게 살고 싶어 질 때가 있다. 트렁크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필요한 옷가지와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약간의 비상식량과 상비약이면 전 세계 어디든 누빌 수 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챙겨 온 짐을 쌌다 풀었다 하다 보면 나름 컴펙트하게 챙겼다고 생각하는 트렁크마저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될 품목도 꼭 한두 개 껴오기 마련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행을 하면 할수록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기보다 내면의 힘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건강한 신체가 최고라는 걸 느끼게 된다.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건 나의 행복한 경험들과 그로부터 오는 마음의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가면 필요 없는 짐들은 정리하고 쓸데없는 소비는 안 할 거야"라며 여행을 할 때마다 항상 버릇처럼 말하지만 한 번도 실천한 적은 없다.
아무튼 이렇게 작고 아담한 작은 방에 사랑하는 세명의 남자가 곤히 자고 있는 이른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조용히 이불 밖으로 나오는 나의 각오는 또 다른 휴식을 위함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어젯밤 요가복을 입고 잤다. 그러고는 일어나자마자 겉옷만 걸치고 선실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왔다.
혼자만의 시간 6:40 AM
11층 피트니스 센터에서 매일 아침 7시 진행되는 '모닝 스트레칭'세션에 참석하려고 한다.
아직 시간이 남아 야외 갑판으로 나갔다. 아직은 육지에서 떨어진 망망대해라 그런지 아침 공기가 꽤 쌀쌀하다. 부지런한 크루들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헬로우~"
"굿모닝"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한 미소로 인사한다. 어제 해가 지면서 수백여 개의 썬베드를 다 접었던 직원들이 아침이 되자 다시 그 많은 썬베드를 일일이 다시 편다. 그들의 일상으로 보이는 업무가 참 힘들 만도 한데 운동을 하듯이 씩씩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걸 보니 나도 함께 기운이 난다.
갑판 위에 있는 바(Bar)로 가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어제 디너테이블에서 알게 된 무료 음료팩 '이지 패키지'를 확인했으니 아침에 모닝커피는 당연한 시작이다.
한 여성이 식당에서 갓 구운 크로와상을 하나 들고 와 커피랑 함께 마시는데 빵냄새가 진동한다. 곧 운동을 시작해야 하니 빵은 참기로 했다.
카페 매니저인지 키 작은 아저씨가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다가온다.
"굿모닝~ 여러분! 푹 주무셨나요? 저는 잠은 설쳤어요. 새벽에 추워서 깼는데 이불이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은데,, 침대 밑으로 흘렀는지,, 참나 너무 피곤했는지 이불 주울 힘도 없지 뭐예요? 추위에 떨면서 잤다니까요. 하하하"
"저는 아주 꿀잠을 잤어요. 밤새 아주 부드러운 항해였어요."
처음 보는 사이지만 배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집 앞 마트 앞에서 만난 이웃 아저씨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뭔가 특별함이 있다.
7시에 맞춰 피트니스 센터로 갔다.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 보고 러닝머신을 달리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참 멋져 보인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태양을 향해 달리는 기분은 직접 뛰어봐야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형 크루즈선들은 20노트(시속 약 40km)로 항해한다. 나도 뛰고 있지만 배도 계속 항해 중이기 때문에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하다. 이 남자는 내가 짐을 찾을 때마다 러닝머신을 뛰고 있었는데 아마도 뛰는 매력에 푹 빠진 듯 보였다. 오늘은 일본인 부부도 눈에 띈다. 아마 베네치아에서 승선한 것 같다. 아침에 몸을 깨우는 가벼운 스트레칭은 상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몸에 신선한 공기를 넣어주고 자신감을 상승시켜 준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크루즈의 아침은 내일도 일찍 일어나자고 나 자신에게 신호를 보낸다.
아드리아해의 중간쯤 왔을까? 바다는 짙은 잉크를 부어놓은 듯 어둡다. 인터넷이 안된다는 건 이럴 때 가장 불편하다. 내가 어디쯤인지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소식도 모르니 말이다. 늦잠꾸러기 우리 집 남자들한테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빨리 일어나라고 깨우고 싶지만 연락을 취할 도구가 없다. 휴대폰에 저려져 살고 있는 요즘 시대엔 아침에 신랑을 깨울 때도 침실로 올라가기 귀찮아 전화를 할 때가 있는데 연락수단이 없는 배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12층 갑판엔 노년의 할아버지가 트랙을 뛰고 계신다. 사실 걷다가 뛰다가 경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탄 배를 한 바퀴 돌면 약 600m 정도라고 하는데 벌써 몇 바퀴째 뛰고 계신 건지 건강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나이를 불문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오래 이렇게 멋진 곳들을 여행하려면 건강이 최고일 테니까.
방은 아직 고요하다.
"얘들아~ 일어나. 밥 먹으러 가자!!" 한 시간이라도 알차게 보내고 싶은 엄마는 마음이 바쁘다.
선실로 배달된 데일리 신문을 보니 오후 하선에 맞춰 배에서 하는 행사들이 많다.
여름의 크루즈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수영장이 빼곡하게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11월의 갑판은 수영하기엔 좀 추운 편이다. 그래도 물속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아침을 먹고 둘째가 수영을 하자고 한다. 지난여름 스위스 제노바 호수에서 3미터 깊이에 도전해 성공한 려환이에게 이제 수심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발이 닿지 않는 2미터의 수영장에 겁 없이 뛰어드는 아이.
"우웩, 물이 너무 짜"
해수구나. 그래 바다니까,, 물은 짜야 제맛이지.
나도 려환이를 따라 짠물 속으로 풍덩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