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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핸드드립 커피란?

by 왕드레킴

"강릉은 어때? 살기 좋아?"

"응, 괜찮아.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

"콩다방이 없어..."


"뭐라고? 그럼, 별다방은???"

"없어.."


"웬일이야? 그럼 너 어떻게 어떻게 살아?"


2012년 10월 남편이 회사 발령을 받아 지환이가 4살 되던 해에 강릉으로 이사 온 후 한 동안 난 여행을 즐기는 이방인으로 살고 있었다. 2년 3개월 후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정을 붙이거나 정착에 대한 의지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강릉이란 작은 도시는 (대) 도시녀인 나에게 백화점 대신 바다를 보여주었고 가끔은 공기 좋은 소금강으로 위로해 주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친구는 걱정하듯 물었다.

당시 서울에서의 '커피'는 스타벅스(=별다방)와 커피빈(=콩다방)으로 지배되던 시기였다.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혼자 나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거나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 한잔을 마시면 힘든 하루의 육아 스트레스가 쫘악 풀리던 시절, 미국의 대형 커피 체인은 나에겐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쉼터 같은 곳이었다. 그런 대형 카페가 강릉엔 단 한 곳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이 쉬는 날 안목해변을 찾았다. 몇몇 카페가 있었지만 모두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커피집들로 세련미도 없어 보였다. 강릉 사람들은 드립 커피를 즐겨 마신다고 했다. 원두에 따라 종류가 다양했지만 오늘의 커피로 추천하는 케냐 한잔을 주문했다. 커피는 시큼하고 싱거웠다. 내가 평소 마시던 무거운 바디감의 쓴 커피와는 달랐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도 울렁거리고 편치 않았다.

그렇게 커피 맛도 잘 모르는 내가 브랜드 커피만을 고집하는 진짜 서울 촌년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고, 스타벅스나 커피빈이 없으니 난 내 입맛에 맞는 핸드 드립 커피를 찾아다녔고 어느새 난 드립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 바리스타가 정성 들여 내려주는 드립 커피엔 기계로 압축해서 나오는 아메리카노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향과 섬세한 맛, 그리고 여유가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스타벅스는 평창 올림픽이 개최를 앞두고 강릉 안목 해변에 진출했다. 오래된 연인을 만나듯 설레난 마음으로 안목을 찾았다. 반가운 초록색과 크루들의 움직임, 묵직한 머그잔도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웬일인가?

오랜만에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고 독한 맛이었다. 독약 같았다.

내가 기억하던 그런 향은 더이상 없었다. 그 동안 난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었나 보다.



12년이 지난 오늘,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영진 해변의 '브라질 커피'를 찾았다.

오늘도 사장님의 턴테이블에서 파가니니의 'La Campanella'가 흘러나온다.

카페 벽에 멋들어지게 쓰여 있는 커피에 대한 예찬이 눈에 들어온다.


'커피는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거우며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아침 바다를 보며 마시는 핸드 드립 커피 한잔은 어느덧 13년째 강릉 살이의 하루를 채우는 에너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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