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만에 산에서 내려왔다
* 다시 가고 싶다.
<5일차>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05:30 - ABC 07:00 - MBC 10:00 - MBC 출발 10:50 - 데우랄리 12:15 -데우랄리 출발 13:10 - 히말라야호텔 14:10 - 도반 15:20 - 뱀부 16:20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해발 4100미터)에서 한참을 머무른 뒤, 아쉬움을 남긴채 다시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의 날씨는 알 수 없었다. MBC(해발 3800미터)를 출발할때 화창했던 날씨는 데우랄리에 도착하자 급변했다. 안개가 짙게 끼더니, 산아래부터 정상까지 구름에 휩싸인 듯 했다. 5미터 앞도 안 보일만큼 시야가 좋지 않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뒤를 돌아 다시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를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았다. 안나푸르나는 정말 활짝 벌려 우리를 반긴 뒤 다시 모습을 감춰버렸다.
오후 4시가 넘어 뱀부(해발 2400미터)에 도착했다. 롯지가 텅텅 비었던 도반과는 달리 뱀부에는 방이 없었다. 우리처럼 이날 ABC를 보고 내려온 서양인들이 먼저 내려와 방을 모두 잡아버렸다. 우리가 ABC에서 경치를 음미하느라 늦게 내려온 탓이었다.
그 다음 롯지인 시누와까지는 2시간 거리. 5시만 넘어가면 어두워지는 산의 특성상 더이상 산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보통 롯지의 숙소를 잡아주는 포터 Mr.그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룽은 한참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묻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와서 얘기를 했다. 숙소가 아닌 현지인들이 자는 곳이 있는데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좋다고 했다... 지붕만 있으면 어디든 누워 잘 판이었고, 고산증 예방을 위해서 MBC에서부터 씻지 않고 있던 우리에게 약간 지저분한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ㅋ
<뱀부의 숙소, 뱀부(Bamboo)라는 지명답게 정말 대나무로만 지어진 집이다. 원래 이 롯지의 직원이 자는 집인데, 자리가 없어서 우리가 들어갔다. 침대 밑에는 야채들이 있어 일종의 창고 노릇도 하는 방이다. 바로 옆에 계곡까지 있어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잠이 들수 있다>
이날 롯지 식당은 빈방이 없는 숙소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로 꽉 찼다. 슬로베니아 사람, 네팔 사람, 이스라엘 사람, 한국 사람들이 섞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가져온 멸치를 내놨고,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소세지와 애플 브랜디를 권했다. 여행을 온 이스라엘 부녀는 다정하게 피자를 나눠먹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게임을 하며 놀때, 난 이스라엘 아저씨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딸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찾은 아저씨.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내가 물었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딸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 어렵다. 더구나 산악 트래킹이라니 쉽지 않다"
그는 말했다.
"딸과 일년에 한두번씩은 꼭 여행을 다니려고 했다. 이번에도 휴가를 내 왔다."
나는 다시 말했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당신을 배워야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오히려 딸을 외국에 보내는 기러기 아빠가 더 많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돈의 문제도 아니고, 시간의 문제도 아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다. 왜 일을 하는가. 딸과 즐겁게 시간을 보낸 뒤 열심히 일을 하면 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한 은행에서 HR(인력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괜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난 은행의 HR은 고용과 해고가 전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훈련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난 다시 얘기했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며 한국의 대부분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거나, 비정규직으로서 보호 받기 힘든 처지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다. 뜻밖이 아닌 당연한 대답이었는지 모른다.
"유니온(노동조합)이 보호해 주지 않느냐."
나는 그의 되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노조의 존재와 역할은 당연하다.. 이 평범하고, 이른바 유행하는 식으로 얘기하자면 '글로벌 스탠다드한' 말을 네팔 히말라야 산맥 한가운데서 음미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식당에서 '21guestion' 게임을 하는 모습. 영화에서만 봤는데, 이들은 실제로 하더라..ㅋ 당사자는 모르게 '한 인물(실존인물도 되고,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도 가능)'의 이름을 쓴 뒤 이마에 붙여놓는다. 그러면 이 사람이 자기 이마에 붙은 이름이 누구인지 주위에 물어보면서 맞추는 게임이다. 슬로베니아 산악회?로 보이는데 술도 안마시면서 기타치고 게임하고 정말 세대를 초월해 재미있게 논다>
<6일차>
뱀부 - 시누와 - 촘롱 - 지누단다
일정을 바꿨다. 원래는 하산길에는 푼힐 전망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에 무릎 통증이 가시지 않아, 그냥 지누단다 온천에 들린 뒤 하산하기로 했다. 푼힐에서는 다시 한번 안나푸르나의 산들을 조망할 수 있었지만, 이미 산 한가운데서 보고 온 마당에 무의미하다는 판단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하루를 더 절약하기로 했다.
시누와에서 촘롱으로 오는 길은 고역이었다. 까마득한 길을 내려간 뒤, 촘롱을 향해 까마득한 오르막길을 오른다. 지누단다는 다시 아래쪽이다. 오를 때와는 반대로 급경사를 30분 정도 내려온다. 촘롱과 시누와가 고개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고, 능선대신 골짜기 골을 이용해 왕래하기 때문이다.
지누단다에서 먹은 닭 백숙, 2100루피를 주면 지누단다 롯지 근처에서 놀고 있는 닭을 한마리 잡아다 이렇게 만들어 준다. 4명 정도 충분히 먹는다. 그동안 안나푸르나 트래킹 루트를 개척한 한국 산악회의 힘이다. ㅋ
지누단다에서 만난 한국인 일행 가운데 한명이 이날 생일을 맞아 닭을 한마리 잡았다. 마늘과 닭만 넣어서 만들지만 맛있다. 특히 닭다리의 뼈가 우리나라의 영계 닭에서 볼 수 없는 크기라서, 먹다가 과연 이게 닭다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7일차>
지누단다 - 뉴브릿지 - 나야풀
<ANNAPURNA SANCTUARY TREKKING MAP>
내려오는데 코스별로 걸리는 시간은 굳이 적지 않았다. 시간을 적는 것은 무의미했다. 얼마나 빨리 산을 내려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얼마나 산을 보고, 느끼고 가는 지가 중요했다. 무심해지려 했다. 어떻게 보면 무릎이 성치 않은 것을 더욱 감사했다.
서울의 고민, 일에 대한 고민, 장래에 대한 고민은 내가 내 몸상태와 다음 목적지까지만을 생각하는 순간 사라졌다.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고 묵묵히 걸었다.
내려오는 길에
이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행자들은 어디에서 왔건, 무엇을 했건,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반가워했다.
나야풀에 도착해, 우리는 포카라로 가는 로컬 버스를 탔다. 일반적으로 택시를 타고 포카라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현지인들처럼 돌아가기를 원했다. 물론 요금도 싸다.
버스에는 이미 사람이 꽉차있었다. 우리는 버스 위에 탔다. 약간 겁이 났지만(한시간 동안 지리산 노고단 가는 길 비슷한 산악길을 버스가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이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냐며 스스로 위안삼았다. 외국인들이 타고 있으니, 길가에 있는 현지인들도 신기하게 쳐다봤다. 혹시 타려면, 따뜻하게 입고 타는게 좋다. 바람을 그대로 맞으니 춥다..
두시간 정도 타면 포카라로 돌아온다. 버스에서 보니 저 멀리 마차푸차레가 한참동안 보였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동네 뒷산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사람들에겐 '동네 뒷산'을 밟아 보기 위해 '세계인'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트래킹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