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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좌회전을 못한 이유

by 이완 기자


“아니 왜 좌회전을 못하게 하지?”

네비게이션은 좌회전을 하라고 소리쳤지만, 사거리에 서 있는 이탈리아 경찰은 좌회전을 하면 안 된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계속 앞으로 가라고 했다. 마주 오는 차선에선 군 트럭과 장비들이 가끔씩 질주했다.


로마에 출장 온 주제에 경찰의 신호를 어기고 좌회전했다가 걸리면 큰일 날 노릇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경찰에게 설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좌회전을 해야 통역을 맡은 이를 만나고, 함께 취재를 하러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 페트로 알피노에 갈 수 있는데…. 입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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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는 길은 호기로웠다. 일본과 미국에서 이미 운전을 해봤으니 이탈리아에서도 못 할까 싶었다. 숙소 앞 길에는 다닥다닥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숙소 주인은 이쪽은 치안이 괜찮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 예약한 렌터카를 전날 빌려 숙소 앞에 주차시켜놨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그렇게 나왔는데 좌회전을 할 수 없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결국 다른 길로 접어들어 돌고 돌아 약속 시간보다 늦게 통역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오늘이 공화국 기념일인 것을 미리 말해줄 걸 그랬다며 웃었다.


공화국 기념일.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물러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이 아닌 공화정을 택했다.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시내에서 열렸고 길이 통제되었다고 했다. 통역자는 이탈리아에 대해 하나 배운 것이라고 위로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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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가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그런 우회로를 통해 배울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출발해 페트로 알피노로 가는 길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평화로웠다. 로마에서 중부 나폴리 쪽으로 길을 잡고 3시간을 달려 산길을 올랐다. 이곳에 어떻게 마을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지대까지 오르자 마을이 나타났다. 아스팔트 대신 자갈이 깔린 길 양옆으로 3층집들이 늘어선, 영화에서나 보던 작은 유럽 마을의 모습이었다. 어느 집 창문이 열리더니 할머니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로마에서 먼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난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유럽으로 오기 전 난민 취재를 어떻게 할지 고심할 즈음, 미리 섭외가 되었던 통역자는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자신의 친구인 마르코가 한 작은 마을에서 난민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퇴근해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 안에서 그 카톡 내용을 보자마자 앞좌석을 치고 싶을만큼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취재 일정상 주말에나 시간이 나는데, 취재를 위해 사람들이 도와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니 이렇게 좋을수가! 현지인의 도움이 있는데 이탈리아 시골 그 어디든 못 가랴 싶었다.


20180602_134232_HDR.jpg 한 난민 가정에 마르코가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거절했다.


페트로 알피노 광장을 지나쳐 시청에 도착했다. 청사에 들어서자 시장과 여러 사람이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니 이런 황송한 대접을. 휴일 임에도 멀리 한국에서 찾아온 취재진을 반겨주려 나왔다고 했다. 이곳에서 2011년부터 시장으로 일하고 있는 주세페 롬바르디 씨는 마을에 난민들이 들어온 뒤 아기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고 했다.


페트로 알피노가 난민을 받아들인 것은 마을 주민 수가 줄고 노령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들의 평균 나이는 65세에 이른다. 한때 1000명이 넘던 인구도 200여 명까지 줄었다.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해, 이곳에 있던 유황 공장이 1978년 문을 닫자 주민이 급격히 줄었다. 청년들도 일자리를 구하러 가난한 마을을 떠나 산업체가 있는 북부로 떠났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는 아기 울음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았던 마을이었다.


결국 이 마을은 주민을 늘리는 방편으로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는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들어온 난민 네 가족 11명이 현재 마을에 둥지를 틀었고, 시리아 난민 9명이 추가로 들어오기로 했다. 난민 한 명에게 지원되는 하루 35유로의 돈은 마을에 도움이 됐다. 이들이 내는 집세와 먹거리 비용 등이 이곳 경제에 새로운 혈액이 됐다. 롬바르디 시장은 “주민들의 수입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정체되어 있던 경제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게 성과”라고 평가했다.


시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이곳을 찾은 난민들을 만났다. 마르코가 이곳 책임자로 있는 가톨릭 구호 단체 ‘카리타스’는 집 한 채를 빌려 난민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직업을 찾아주는 ‘웰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20180602_135410_HDR.jpg 마을 사람들과 이곳에 온 난민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가나에서 온 난민 가족은 아기를 안고 나왔다. 두 달 전 마을에 도착했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 뒤로 숨는데 남편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가나 출신인 이들은 이탈리아어나 영어에 서툴다. 간신히 인사말 정도만 나눴는데, 마르코는 이들이 리비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들어왔는데, 부인이 리비아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귀띔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20180602_125236.jpg 마르코 사무실에 걸려있던 깃발


다음은 나이지리아 난민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이들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들 가운데 청년 한 명은 1리터짜리 물 한 통만 들고 리비아 사막을 건넜다고 했다. 그는 중간에 소변을 본 것을 물통에 다시 담아 마셔가며 버텼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또 다른 난민 가족의 아내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남편 라즈비르 싱은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가 유튜브로 공부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 됐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2016년 탈레반에 의해 부모 등이 죽은 뒤 아프가니스탄 북부 고향 마을을 탈출했다. 유럽에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핀란드에 들어왔다가 버려진 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까지 왔다. 라즈비르 싱은 이제 고향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곳의 삶은 항상 위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 오게 돼 신에게도 감사하지만 마르코에게도 감사하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마르코는 그의 친구가 되어줬고 외국인이 따기 힘든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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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산골까지 들어온 난민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베네벤토시에 들렀다. 난민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일정이 늦어졌지만 마르코가 소개하겠다고 한 ‘피에트라 앙골라레’ 상점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어렵게 일정을 다 잡아줬는데 피곤하다고 그냥 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역 조합 조직인 피에트라 앙골라레는 지역에서 키운 농산물을 애용해, 지역 경제와 환경을 지키자는 운동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만난 자원 봉사자 안젤로 차바렐리 씨는 “이 조합이 잘 돼서 청년들이 다른 지역이나 국외로 떠나지 않고 지역사회에 남아 활력이 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업이 자본주의 기업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상점에 있는 주민 10여 명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직접 만든 올리브유와 와인, 치즈를 흔쾌히 권했다.


역시 세계 어디를 가도 시골 인심은 후했고, 우리는 음식을 계속 권하는 손을 거절하지 못했다. 한참을 먹고 나오니 이곳 광장에서도 경찰 악대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역시 공화국 기념일을 맞아 열린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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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은 시민의 힘으로 만든 나라다. 공화국 이탈리아는 난민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 탓에 ’난민을 배격하는’이들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2018년 4월 우여곡절 끝에 총선에서 승리한 포퓰리즘 세력과 극우가 손을 잡고 정권을 획득했다. 공화국 역시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마르코도 “이탈리아에게 매우 중요한 날에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초입 겨울 서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집회에서 마주한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는 말이 생각났다. 공화국은 지켰지만 제주도에 들어온 난민에게 문을 열어주지 못한 한국, 난민에게 시민이 되는 문을 열어줬지만 ‘난민 혐오’가 불어 닥친 이탈리아.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부가 들어서며 ‘더는 좌회전을 못 하게 하는’공화국의 반도를 다시 거슬러 로마로 향하는 길에서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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