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수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안건 의결이 끝난 뒤 경계현 디에스(DS) 부문장, 노태문 엠엑스(MX) 부문장과 박학규 경영지원실장, 박용인 시스템엘에스아이(LSI) 사업부장, 최시영 파운드리 사업부장 등 주요 경영진 13명이 단상에 올라 한 시간 남짓 주주들의 질문에 답했다. 지난해 영업이익 6조5700억원 등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5년 만에 10조원을 밑도는 실적을 냈고, 최근 주가 부진에 따른 곤혹스러운 질문이 나올 게 분명했지만 ‘주주와의 대화’ 시간을 사상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다. 마치 짜인 각본이 있는 것처럼 안건만 후다닥 통과시키고 끝났던 일부 기업의 모습과 견주면 분명히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주총장에서 삼성의 최고의사결정권자로 꼽히는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재용 회장이 목격된 것은 이날 오후 다른 행사장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떡볶이 모임’을 한 지 석달 만에 서울 여의도에서 연 ‘상공의 날’ 행사장에 재벌 총수들을 다시 불러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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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이곳에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를 콕 집어 “업적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무엇보다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혜안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자인 이재용 회장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상찬’을 내놓은 것이다.
한겨레는 3월에 ‘반도체 지경학, 칩 왕좌의 게임’ 시리즈 기사를 세차례 냈다. 상찬은 없었다. 미국 애리조나와 중국 베이징에서 쓴 1회는 첨단 기술 경쟁으로 표면화됐지만, 실제론 두 나라 모두 자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2회에선 인력 부족과 높은 생산 비용 등 반도체 제조업 부활이 어려운 이유를 극복하기 위한 미국 학계 등의 혁신 노력을 다뤘다.
3회는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였다. 비메모리와 파운드리(위탁제조)로 사업을 확대한 삼성전자는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본진’인 메모리 사업에선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추월을 허용했고, 파운드리에선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 따라잡기와 공정 개선에 능숙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창조적인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방향을 잃은 건 아닌지 우려했다.
이 기획은 마무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정부의 화끈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좋아 빠르게 가’ 식으로 끝내면 좋으련만, 살펴본 것처럼 문제는 정치, 경제, 외교 등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데 이를 풀어낼 깊이 있는 고민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0년 전인 2013년만 하더라도 한국 수출품목 가운데 반도체 비중은 10% 안팎이었다. 2017년(17.1%)부터 이 비중은 껑충 뛰어 최근 2~3년 사이 20% 안팎까지 올라왔다. 지난해 반도체 불황으로 15.6%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주로 수도권에 공장을 둔 전자부품(기흥·화성·평택·이천의 반도체 등) 업종 생산 증가율이 지난 12년간 크게 높아지면서, 수도권 경제력 집중 현상이 더욱 심화한 것도 드러났다.
게다가 ‘알이(RE)100’ 등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재생에너지 공급에 대해선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반도체 생태계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소재·부품·장비 분야에 대한 지원은 2019년 일본의 기습적 수출규제 이후 ‘반짝’했다가, 다시 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돈으로 판을 뒤집으려는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보조금 경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땅·전력·물 ‘몰아주기’와 기업이 기업 할 ‘자유’를 결합하는 건 과거의 성공방식이었다. 새 전략이 필요하다. 그 시작은 상찬을 듣기보다 고민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토론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20일 오전과 오후는 전진과 후퇴의 갈림길에 처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중요한 순간이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