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간에 분쟁이 벌어진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을 보며, 한국 기업의 '다른 경영'은 어려운가 생각해봤다.
2015년 가을, 날씨는 을씨년스러웠지만 코펜하겐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웃음이 배시시 나왔다. 덴마크 제약회사 노보노디스크를 취재했는데, 전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1999년에 세계인권선언을 일상적 경영에서 이행할 것을 공표하고, 이사진 11명 가운데 4명은 직원 대표라니. 지금이야 비만 치료제 ‘위고비’가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하면서 국내 ‘서학’ 투자자에게까지 알려진 이름이지만, 당시 제약업계 밖에선 알려지지 않은 당뇨병 치료제 회사였다.
9년 전 기사가 떠오른 것은 국내 대표 제약회사인 한미약품 상황을 보면서였다. 한미약품은 올해 초 창업주 일가 내 분쟁이 불거졌다. 창업주 고 임성기 회장의 부인 송영숙 회장과 장녀 임주현 사장은 소재·에너지 기업 오씨아이(OCI)그룹과 통합을 추진했고, 이에 반발한 장남 임종윤 한미약품 대표와 차남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는 주주총회 표대결을 통해 통합 결정을 뒤집었다. 장·차남의 승리로 끝난 것 같았던 ‘케이(K)재벌 드라마’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장·차남 편에 섰던 한미사이언스(한미약품 지주사) 대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돌연 송영숙 회장 모녀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신 회장은 지난 3일 송 회장 모녀와 한미사이언스 지분 매입계약을 맺어 이들의 상속세 부담을 해결해주면서, 한미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꾸리겠다고 했다.
반년에 걸친 경영권 분쟁이 끝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회사에 남긴 상처는 커 보인다. 창업주 일가의 싸움에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해졌고, 바이오 산업의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간은 흐트러졌다.
일부 언론은 이 틈에 창업주 일가의 ‘상속세’ 부담이 이러한 막장 드라마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상속세 부담이 줄어든다면 싸움은 없었을까? 되려 좀 더 본질적인 문제인 시가총액 3조9000억원에 이르는 기업을 누가 잘 경영할 수 있을지 따지는 건 뒷전으로 밀렸다. 시장에서 이번 사태 때 한미 경영에 누가 적임자인지 인정한 이는 따로 없었다.
한미약품뿐만이 아니다. 아워홈에선 회사 매각에 대한 이견으로 대주주 일가 내 합종연횡이 이뤄지며 경영진이 바뀌었다. 그동안 경영에 참여한 적이 없던 장녀 구미현씨와 구씨의 남편이 막내 구지은 대표를 밀어내고 갑자기 경영 일선에 나섰다. 한국타이어도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의 경영 능력을 두고 창업주 일가 내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창업 100년을 맞은 노보노디스크 이야기로 돌아오면, 여기는 창업주 일가가 만든 재단이 회사를 지배하는 구조다. 차등의결권을 통해 지배력을 보장하지만 이사회에 직원 대표 등이 참여하는 등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방식이다. 재단은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장기 연구활동을 지원한다. 이 회사의 기업지배구조 보고서는 “재단은 노보노디스크의 상업 및 연구 활동을 위한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하고 과학적, 인도주의적, 사회적 대의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사회는 직원 대표뿐만 아니라 성별·국적별로 다양하게 구성해 전문성을 높였다. 현 이사진 12명 가운데 직원 대표는 4명이고, 여성은 6명이다. “복잡한 글로벌 헬스케어 환경에 적합한 관점을 논의할 수 있도록 이사회는 다양성을 지향한다”며 “최소 2명의 북유럽 국민과 2명의 비노르딕 국민을 포함한다는 목표, 최소 3명이 여성이고 3명이 남성이라는 목표도 달성됐다”고 회사는 밝혔다. 이 회사의 지난해 순매출액은 약 45조원, 영업이익은 약 20조원에 이른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물려받은 회사를 팔 거냐 말 거냐로 한정하면 갈등이 불거지는 기업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상속세 걱정에 지주회사 주가를 낮추고, 돈 되는 계열사를 이리저리 갖다 붙이는 것도 건설적이지 않다. 불화를 막는다는 이유로 장남에게 몰아주고, 형제간 순번을 정해 맡는 것도 전혀 혁신적이지 않다.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해 이제 좀 다른 상상을 해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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