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광고대행사 AP로 광고계에 입문을 했어요. 그러다가 곧 AE로 발령이 나서 계속 AE 생활을 하다가 광고주로 이직한 케이스입니다. 최근에 들어온 신입사원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광고일을 하고싶은데 대행사로 갈지 인하우스로 갈지 고민을 했었다는 말을 종종 들어요. 아무래도 일이 대행사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진행하는 방식이다보니 대행사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저는 주니어 시절은 광고대행사에서 보냈지만 그 몇배의 커리어를 인하우스에서 쌓았고 지금은 다시 대행사로 가라고 해도 갈 수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처음 인하우스로 오고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기업문화, 그리고 전반적인 회사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특히나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가진 제조업의 광고팀으로 이직했어요. 대행사에서는 모두가 한팀이라는 분위기가 있는데 인하우스는 각자 자기의 일을 하는 구조입니다. 물론 대행사에서도 기획, 제작, 매체 등등 각각의 역할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모두가 달려가는 분위기잖아요. 그런데 인하우스로 오면 정작 광고담당자는 한명인 경우가 많고 여기에 끝도없는 결재라인과 합의를 거쳐서 실행까지 가는건 본인의 몫입니다.
일단 그래도 대행사에서는 서로 소통이 됩니다. 모두가 광고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의견이 달라도 주로 전략방향이나 크리에이티브를 풀어가는 방식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하우스에서는 그냥 광고에 대한 기본 지식이 아예 없는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고에는 정답이 없다보니 누구나 한 마디씩 거든다는 거예요. BM은 그나마 브랜드에 대한 이해라도 있지 영업의 파워가 쎈 조직에서는 영업의견까지도 광고에 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임원과 대표의 성향도 무시할 순 없죠. 처음의 기획과 최종 제작물의 갭은 이런데서 발생합니다. 처음 인하우스로 자리를 옮기고 '나는 좋은 광고주가 될거야.'라는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대행사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광고주의 '작태'에 대해 그 이면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발언권이 생겨요. 비록 임원의 눈치를 봐야하지만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캠페인을 끌고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죠. 광고 하나 온에어하고 나면, 며칠 뒤부터 바로 그래서 매출 얼마 올랐어?에 시달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워라밸이 획기적으로 개선됩니다. 이건 회사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대행사 시절만큼 주구장창 야근하는 분위기는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 이 점이 대행사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어요. 한번 몸이 편해지니 다시 주말에 출근하고 새벽까지 불태워 일하고 회의하는 건 못하겠더라구요.
인하우스 광고팀에서 광고 캠페인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의 비중이 전체 업무 중에서 그리 크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광고와는 관련이 없는 각종 회의자료 작성과 온갖 행정업무 처리에 대부분의 일과시간을 할애합니다. 요즘은 특히나 IMC라는 개념이 보편적인데 '이것도 제가 하나요?'라는 업무들이 정말 많아요. 대행사에서 메일이 와도 바로바로 확인 못하고, 대행사에서 주구장창 달려서 보내온 기획서도 보고 타이밍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하루이틀 넘겨버리는 일도 허다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좋은 기억은 다 잊혀졌는지 대행사에서 야근하거나 열띤 제작회의를 했던게 그립기도 해요. 그때는 정말 모든 업무가 광고였거든요. 밤새 작업하고 광고주로 출발하던 아침, 꼭 팔아오라고 엘베 앞까지 마중나오던 제작팀 얼굴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물론 굉장히 미화된 작은 기억일거에요.
지금은 힘들게 영업에서 벌어온 돈 펑펑 쓰는 사람 취급 받으며 여기저기 눈치만 보는 신세입니다. 광고 반응보다는 매출이 얼마나 올랐느냐가 중요하고, 그저 대행사에서 일 다해주니 편한 부서라는 인식도 여전합니다.
광고대행사에서 주니어 시절을 보낸 건 아직도 제가 광고일을 하는 데 있어 든든한 버팀목 같은 기억입니다. 대행사에서 팀장까지 달고 계속 일했었다면 그건 또 그 나름의 커리어로서 보람이 있었겠죠. 하지만 가장 많이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사원, 대리 시절에 광고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었던 건 제게 큰 무기 중 하나입니다. 사실 그 때 배운 업무 중 지금 써먹는 건 없어요. 이제 테입이나 필름을 떠서 출고하는 시대는 아니니깐요. 하지만 광고를 대하는 자세를 배웠어요. 그 때 선배들이 한번 더 고민하고 한번 더 디테일을 챙기던 그 일하는 방식을 옆에서 보고 배운 건 큰 자산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때 교수님이 나중에 사회나가서 만나 무슨일 하냐고 물었을 때, 어디 다닌다는 말 대신 광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냥 회사 다니는데 업무가 광고가 아니고, 나는 광고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제 근본이 광고대행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