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관용에 대하여
마지막 일주일
퇴사일을 앞두고 어젯밤 문득 '관용'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떠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회사와 대표에게 바란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틈이 있다.
생각의 차이, 말의 온도, 감정의 진폭, 각자 속도의 간극 같은 것들.
그 틈이 때로는 사람을 멀어지게 하고 또 상처도 만든다.
나는 예전에 그 '틈'들을 그냥 넘겼다.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내가 더 맞추면, 내가 더 해내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더 나아질 거라 믿었다.
퇴사 과정에서는 그 틈이 더 커져 갔다.
그간 '괜찮다'는 말로 내가 스스로 다독이며 넘겨 왔던 것들을 그들은 무심하고도 무례하게 선을 넘었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서로 등을 마주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들.
그렇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없는 걸까?
남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떠나는 사람은 남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다 하는 것.
그것이 예의이자 관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의 과정이야 말로 '관용'이라는 말이 필요한 순간이다.
관용은 단순히 참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나 자신도 지켜야 하는 일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관용은 '서(恕)'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의미다.
불교는 관용을 '무아(無我)'로 설명한다.
모든 건 변하고 고정된 자아는 없으니 자기 고집을 내려놓아야 타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
내 감정을 지나치게 움켜쥐지 않아야, 누군가의 실수에도 숨 한번 쉬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관용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는 분명 아닐 거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무례할 때 그저 관용이라는 틀 안에 나를 가둔다면 그건 나 자신을 '방임'하는 것과 같다.
관용은 기준 없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과 '스스로를 지키는 선' 사이의 균형이다.
틀리다는 것을 다름으로 받아들일 줄 알면서도 그 다름이 경계를 넘을 땐 분명히 선을 긋는 일.
이제 앞으로의 관용은 상대를 위한 이해이자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