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재미있으세요?

재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분석

by 워너비 아티스트



재미있게 살기로 결심한 아이


"오빤 요즘에 뭐가 재밌어?"

"응? 글쎄.. 사는 게 뭐가 재밌니?"

"어, 왜? 난 너무 재밌는데 - "


나와 남편이 연애 초반부터 여러 번 했던 대화이다. 길거리에 말똥만 굴러가도 웃길 딱 그 나이대라 내가 그렇게 모든 게 다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여간 나는 막 20대에 진입하던 저 시절, 또 그 이전의 시절, 그리고 그 이후의 시절에도 재밌는 게 많은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홍은동의 가파른 언덕이 있는 산동네에 살던 80년대 초반, 나는 학교와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공부도 재미있고 여자 아이들과의 수다도 재미있고 남자아이들의 관심도 너무 재미있어 등굣길 그 언덕길도 힘든 줄 모르고 다닌 기억이다. 주말에는 동네 애들을 모아놓고 여러 가지 놀이들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그 꼬불꼬불하면서도 경사 무지 살벌한 동네에 3-4개 지점을 정해 놓고 릴레이 달리기를 하자고 애들을 꼬셨다. 아침부터 30도가 육박한 그 여름날, 우리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아니 내가 시킨) 달리기 계주를 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밖에 나는 땅따먹기, 고무줄, 부루마블, 오목, 장기, 피구, 달리기 모두를 참 재밌어했다. 어찌 보면 내게 친구란, 같이 재미난 놀이를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혼자 피아노 치며 고래고래 노래하는 것도 좋았고 책도 정말 좋아했다. 운동회도, 소풍도, 방과 후 청소도, 백일장도, 심지어 시험도 재밌어하는 좀 이상한 아이였다.


세상에 이리 재미난 게 많다는 걸 느낄 12살 무렵, 문득 나는 결심했다. 어떻게 살 거냐면 재밌게 살겠다고. 재미난다는 이 감정만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없는 것 같다는 확신을 하면서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싫었던 한 가지


물론, 이런 찬란한 재미있는 날들이 있는 반면 요즘말로 극혐으로 싫어하던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피아노 연습이었다. 내가 피아노에 소질 있다는 말을 들으신 엄마는 보더 콜리가 양을 몰듯이 내게 피아노를 시키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체르니 40번을 시작하면서 매일 하루에 세 시간의 연습을 해야 했다. 학교 숙제하고 피아노 연습까지 마치고 나면 거의 저녁 먹을 시간에 육박해, 동네방네 찾아다녀도 친구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있기 일쑤였다. 피아노 연습하는 동안 친구들이 놀러 와 엄마가 돌려보내는 소리를 듣는 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재미없던 피아노 덕분에 세상의 나머지 것들이 다 달콤하고 재미나게 느껴진 걸까? 아니면 재미나고 궁금한 게 너무 많은 나였기에, 피아노 의자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있던 3시간이 그렇게 고문이었을까? 피아노를 치면서 맘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싫은 감정을 참으며 매일 3시간을 보낸 이 경험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게 각인시켜 주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재미없는 일, 재미없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중학교 들어오며 피아노에서 해방이 되어 나는 온전히 나에게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모두 다 재미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더 이상 공부가 재미있지 않았고, 대학교 때의 그 좋던 연애도 나를 비참하게 만든 시기가 있었다. 직장이라는 곳도 처음 수년간은 너무 재미있었지만, 결국 세상의 불합리함도 목격하고 믿던 동료들에게 배신감을 경험하기도 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성인이 된다는 건 재미를 추구할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간이 있을때 마다 자동적으로 '뭐 재미난 일 없을까' 라는 물음표에 스위치를 켰다. 새로운 모험. 만만찮은 도전. 남들이 안 가본 길. 이런 데에서 유달리 매력을 느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적어도 건강에는 좋지 않을까


"근데 보통은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언니는 재미의 종류도 정도도 촘촘한 것 같아."

"그런가.. 원래 어릴 때부터 호기심도 많고 재밌는 것도 늘 많았어."

"언니, 그렇게 만사가 재밌으면 우울증도 안 걸릴 것 아니에요"


엊그제 본 후배가 나의 재미 추구적 인생관에 급 관심을 갖더니 이런 코멘트를 덧붙이는 거다. 그렇지, 그럴 가능성도 있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는 잘 산 인생은, 살아 있는 동안에 신기한 거 궁금한 거 재밌을 것 같은 거를 최대한 많이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유한하기에,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큰 재미를 향해 가는 긴 여정이 있고 그 안에 또 하루하루의 작은 재미를 쟁취하는 노력이 있으니.


재미의 정의 - 김수진 버전


그런데 후배의 말을 들으며 문득 든 생각은 이거다 - 혹시 내가 아무거나 재미있다고 갖다 붙이는 건 아닐까?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에, 어떤 경우에 재미란 걸 느끼는가. 나의 재미가 다른 사람도 공감할 수 있을 그런 감정이고 기준일까?


내가 재미를 느끼는 것들의 속성을 정리해 보았다.


1) 뭔가를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행위를 좋아한다. 지금은 꽃으로 그것의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지만, 이전에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도 만들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예쁘고 새로운 것들을 생산하는 행위와 소비하는 행위를 둘 다 즐기지만, 소비만 하고 생산을 오래 안 하면 짜증이 나고 자존감이 구겨진다. 마음 깊은 곳에 내가 만들어 낸 것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반응을 일으키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내 재미의 피크이기도 하고 인정욕구의 가장 첨예한 부분이다.


2) 새로운 환경에 나 자신을 던지는 일을 좋아한다. 거기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낯선 문화를 익히고, 삶의 한 챕터를 잘 일구어 내는 그런 서바이벌 게임 같은 요소를 즐기는 구석이 있다. 신밧드의 모험과 미래소년 코난의 모험을 너무나 좋아해서 이렇게 된 걸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또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울 나에 대한 설렘 이런 것들이 나한테는 큰 동력이었다. 근데 막상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새로운 경험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이 내게 앞으로 얼마가 남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난 계속 지금 같을 수 있을지.


3) 셋째,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를 또 내 주위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이 즐겁다. 한 곳에서 안정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아서인지 내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내재해 있는 느낌이다. 나에 대해, 또 삶에 대해 이런저런 통찰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뿌듯하고, 이것들을 다시 사람들과 함께 글로 또 대화로 나누는 경험이 소중하다.


정리해 보면 나라는 사람은 창의적인 생산 활동을 매우 재미있어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통찰력을 키워가는 여정을 즐긴다. 재미난 것들을 반복하여 점점 잘하게 되는 진화의 과정은 재미의 제곱으로 짜릿하다. 그러는 와중에 마음에 감동을 주는 훌륭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 또한 내가 지구에 오길 참 잘했어,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렇게 써 놓으니 쫌 멋지게 들리는군요...ㅎ)





재미 없는 인생의 구간


반면 우리는 모두 일정한 양의 재미없는 일을 해야만 한다. 재미없는 일이 주는 괴로움에서 가장 자신을 잘 보호할 장치는 나의 선택권 행사이다. 아무리 재미가 없더라도 그게 내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그건 덜 괴롭다. 내가 선택한 진로, 내가 선택한 배우자, 그리고 내가 원했던 해외 살이가 생각보다 힘들거나 싫을 때, 적어도 그걸 해결하기 위한 집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싫은 걸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해야 할 때 그 어두움과 불행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일상에서 꼭 해야 할 재미없는 일들은 어떻게든 좋아하려고 노력을 한다. 좀 별로인 사람과 일을 해야 할 때는 그가 그리 옹졸하거나 고집스러울 이유를 찾아 이해하려고, 또 그의 좋은 점을 확대해서 보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이상한 클라이언트들과 일 할때 자주 이런 방법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다. 내 권한 밖의 이유로 맘에 안드는 누군가와 일해야 하는 건 피할 수 없지만, 그 과정을 내가 얼마나 진저리 나게 싫어할지 아니면 그냥 적당히만 싫어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므로 이런 부분에서 내가 나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애쓴다.


재미가 없는 인생의 구간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인가. 요즘 느끼는 건 이것이 무섭도록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칫 인생 전체에 흉터로 남을 큰 상처가 되는 경우들을 봤으니까. 힘들고 싫을 때, 재미없음의 슬기로운 대처, 이게 사실 재미있는 삶을 위해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정이 중요한 삶이라는 건..


어쩌면 내가 인생에서 기대하는 것들이 비교적 소소해서 결과보다 이런 '과정'을 즐기는 삶이 가능한 게 아닐까. 높고 웅장한 산 봉우리를 향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 두리번두리번 어딘가 피어 있을 예쁜 들꽃 찾아 헤매는 아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인지 모르겠다. 이런 삶의 모드가 그저 좋다고 말 할수는 없을 것 같다. 나름의 리스크가 있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재미를 느낄 날들


어쨌건 지금 드는 생각은, 아직도 나에게 재미를 주는 일들이 있음에 굉장히 감사하다는 것. 오래도록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들을 봤으니까. 아니면 거친 세월에 마모된 감각들이 더 이상 그 무엇도 재미있게 느끼지 못할 미래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재미난 것들이 세상에 남아 있다고 느끼는 지금을, 지금의 나를 소중히 여겨야겠다.


요즘 무슨 재미로 사세요?





*네덜란드에서 플로리스트 및 투어 가이드로 www.flowerandflour.nl 를 통해 재미난 활동을 주기적으로 기획하고 운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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