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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May 11. 2017

루저라면 15%에 집중하자

나는 비관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살면서 "성격은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바뀌진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성격이란 "천성 + 과거"이다. 천성도 바꾸기 어려운 것이고,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성격이 백팔십도 바뀐 경우를 한 번 보기는 했다. 안내양 시절이었는데, 기사 아저씨 중에서 '합죽이 아저씨'라고 불리던 분이 있었다. 그는 굉장히 까칠한 기사였다고 하는데, 이가 다 빠지도록 심각한 교통사고에서 살아난 이후로 마치 원효대사가 해골 속의 물을 마시고 득도하듯 인생에 깨달음을 얻어 보살 같은 인격을 가지게 된 분이다. 내 기억 속에서 그는 마치 하회탈처럼 허허 웃는 인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나는 남들이랑 밥을 잘 못 먹는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엄마가 학교 외에는 집 밖에를 전혀 못 나가게 해서, 나는 친구네 집에 가본 적도 없고, 골목에서 놀아본 적도 없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짝이 "나 어제 집에 가서 참외 먹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받았던 충격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수업 끝나면 책 속의 내용처럼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다. 책을 읽을 때는 그 안의 모든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인다. 하지만 내가 접어두면 그들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내가 책을 펼치면 그때부터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 것처럼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이며 친구들은 내가 집에 오면 그렇게 접힌 배경으로 가만히 있는 건 줄 알았다. 내가 집에 가서 밥 먹고, 책 보고, 참외를 먹을 때, 내 짝도 집에 가서 참외를 먹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나는 그렇게 현실감이 떨어졌다.


엄마가 우리를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런 성격 때문에 나는 엄마 원망을 많이 했다. 대학 다닐 때 한 번은 다 엄마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가 사람들과 밥을 못 먹는 거라고 엄마한테 대든 적이 있었다. 의외로 이 부분에서 엄마는 상당히 억울해하셨다. 나는 두어 살 때부터 벌써 집에 손님이 오면 밥을 한 숟가락도 못 먹었다고 한다. 손님이 아무리 여러 시간 있어도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손님이 가야 '엄마, 밥...' 그랬다고 하니, 이쯤 되면 천성이다.


밥을 같이 못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냥 같이 먹으면 되지, 그게 뭐? "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고, 혹은 나를 아는 지인이라면 "맨날 남들이랑 먹더구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맞다, 나도 남들과 자주 같이 밥을 먹는다. 그런데 내게는 그 '남들'이 등급에 따라 나뉜다. 한 시간 밥을 같이 먹었을 경우에 두어 시간 아프면 되는 사람, 사나흘은 아파야 하는 사람...

낯을 많이 가려서 식구 아닌 사람과 밥을 먹으면 열이 나고 몸이 아프다. 혹시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야 하거나 여러 시간을 머물러야 하면 당장 목 밑의 임파선이 붓는다. 솔직히 엄마랑 같이 먹는 것보다도 혼자 먹는 게 좋고, 언니네 식구만 해도 같이 밥 한 끼 먹으면 두어 시간은 자 주어야지, 안 그러면 몸살이 난다. 그래서 나는 밥 먹는 약속을 일주일에 하나 이상 잡지 못한다, 일주일에 어쩌다가 밥 먹는 약속이 두 개라도 되면, 그 한 주는 아무것도 못하고 잠만 자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정말 그 사람과 밥이 먹고 싶다는 뜻이다. 아프더라도 같이 먹어야지 하고 굳게 마음먹고 만나는 것이다. 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적당히 아는 사람과 만나서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경우는 정말 최악의 사태이다.

대학 다닐 때는 늘 몸이 아팠다. 이런저런 학생회 모임에 참가해서 그렇다. 집에 가서 꼼짝 못 하고 자면, 엄마는 "또 누구랑 밥을 먹고 왔냐"라고 화를 내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나의 이런 성격 때문에 거의 절망에 빠졌다. 이 사회에서 내가 일하며 살 수 있는 구석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한 글을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85%이다, 개인의 기능은 15% 밖에 작용하지 않는다"라는.  저자는 그래서 인간관계가 중요하고, 마땅히 인간관계를 넓히고 원만히 하는 데에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15%라는 숫자에 시선이 꽂혔다. "인간관계가 100%가 아니었어? 내게도 15%의 기회가 있다는 거야?"


생각해보라, 어떤 신체장애자가 있다고 하자. 그에게 이 사회의 문이 15% 열려 있다고 하면, 그는 결코 적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15%라는 숫자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래, 내가 기능을 15% 가득 갖추면 되지". 그리고는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HSK 11급을 땄다. 사실 어학점수라는 건 꼭 높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7급 정도면 이력서 내기에 충분하고, 일상회화도 가능하므로 대부분 취업을 목표로 중국어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7급 정도에서 만족했고, 중문과 출신이거나 하면 9급, 10급을 목표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11급이 필요했다. 내가 만족시킬 수 있는 15%는 최대한 만족시켜주어야 하므로.


11급의 성적표를 들고 한국에 돌아와서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점심을 혼자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승진이 없어야 하고, 회식이 없어야 하고, 회사의 총인원이 5명 이하이면서, 중국어를 쓰는 일이 주 업무이어야 했다. 그때는 일자리가 별로 귀할 때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력서를 백 통이나 썼다. 위의 조건들을 다 만족시키는 회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일하고 싶었던 곳은 사람이 두어 명쯤 있는 출판사였지만, 32세의 신입 편집부원을 뽑는 출판사는 (최소한 그때는) 없었다. 문을 백 번 두드린 후에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중국 회사를 찾을 수 있었다.  결론은 이 사회의 1%가 내게 문을 열어준 것이지만, 1%면 어떤가, 백 곳에서 다 오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백 군데서 일할 게 아닌데.


그 후로도 나는  늘 15%에 집중했다. 여태까지 내가 기획한 책을 여섯 권 냈는데(출판 예정 포함^^),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이지만, 자기 이름이 적힌 책을 한 권도 못 가진 이들도 많으므로, 나쁘지 않은 실적이다. 더욱이 그중 한권은 인세로 6천만원을 받았으니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책 여섯 권을 내기 위해 내가 썼던 기획서는 마흔 개 정도 된다. 다시 말하면, "이러이러한 컨셉으로 책을 내고 싶습니다"라는 메일을 보내서(물론 한 번에 여러 군데), "죄송하지만, 저희 출판사에서는 곤란하겠습니다"라는 거절의 메일을 서른 번(한 번에 여러 통씩;; )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정확히 15%의 확률이다. 그러면 어떤가, 여섯 권이나 세상에 나왔는데. 그리고 책을 쓰는 일은, 누구랑 밥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사를 잘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고3 때까지 이천 권 넘게 읽은 책이 알게 모르게 바탕이 되어서, 나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해당한다. "죄송합니다..."에 좌절할 이유가 없다, 15%는 열려 있으므로. 그리고 그 15%만 해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므로.


내게는 인간관계가 85% 의 높은 장벽이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85% 의 장벽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얼마 전 내 시선을 확 끄는 기사가 있었다. 고3 때까지 야구만 해서 알파벳 p와 q도 구분을 못하던 야구선수가 프로 지명에서 탈락한 후, 수능 400점 만점에 70점인 실력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지금은 사시 합격생 109명 중 18등의 성적으로 사법 연수원에서 연수 중이라는 기사였다.  이 인생 역전의 주인공 장정수 씨는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야구선수 시절의 교훈을 잊지 않고, 그의 유일한 장점인 체력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솔직히 그의 고3 상태라면, 장애인만큼의 절망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으리라.  그에게는 아마 실력이란 벽이 85%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런 그에게도 기댈 것이 있었는데, 바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그만의 15%의 기능, 체력이었다. 그가 그에게 닫혀있는 85%를 보면서 절망했다면 오늘의 그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장정수 씨의 예와는 반대로 안타까운 경우도 한 번 있었다. 지난 번에 있던 학원에서는 신규 강사를 면접할 때 종종 강사 대표로 함께 참가하곤 했는데, 한 번은 겨드랑이 암내가 몹시 심한 지원자가 왔다. 교실 안은 금새 암내로 가득했고, 우리는 그 지원자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합격시켰다. 상처 받을까봐 직접 말해주지 못했지만, 난 정말이지 그 지원자를 붙들고 말하고 싶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라고. 

남들과 밥을 못 먹는 내가 고를 수 있는 직업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못 먹는 걸 잘 먹는 척하고 직업을 찾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겨드랑이 암내가 몹시 심한 사람이 찾을 수 있는 직업에도 한계가 있다. 학원 교실 중에는 서너 명 밖에 못 들어가는 작은 교실도 많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작은 공간에서 일해야 하는 업종이 85%의 벽이 될 것이다. 이런 경우 그 85%의 직업에 도전하면서 계속 좌절할 게 아니라, 15%의 나머지 직업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마마보이라든가, 대인공포증이라든가, 신체장애라든가, 결손가족 출신이라든가... 남들은 잘 알아주지 못하는 나만의 결함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것들은 노력한다고 고쳐지지 않을 수 있다. '천성' 혹은 '과거의 유물'이므로. 하지만, 그래도 우울할 것 없다, 우리에겐 충분히 공략해볼 나만의 15%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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