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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Oct 03. 2019

살아서 돌아온 자 - 박노해

박노해 시인을 좋아합니다.

이생진 시인의 시를 좋아하던 소녀소녀했던^^ 시절, 박노해 시인의 시는 왠지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는데, 

<군대 가는 후배에게>를 읽고

이 사람, 진짜구나

하는 느낌이 온몸을 관통했던 충격을 아직 기억합니다.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라며 군대 거부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운동권에선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하는 물결이 있었고요

난 교회를 다녀서

진정한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아는 사람들이 다 운동권이었지요.

그런 시대에 박노해 시인은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니 네가 빗자루 한 번 더 들어라

이런 시를 썼습니다.

이 사람, 옳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국 장관에게 헌정한 시가 있다고 해서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너무 속상하고 답답한데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고 위로해주네요

역시 박노해 시인은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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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돌아온 자  _  박노해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눈보라와 불볕과 폭풍우를

다 뚫고 나온 강인한 진실만이

향기로운 사과알로 붉게 빛나니


그러니 다 맞아라

눈을 뜨고 견뎌내라

고독하게 강인해라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음해와 비난은 한 철이다

절정에 달한 악은 실체를 드러낸다


그대 아는가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자는

그 존재만으로 저들의 공포인 것을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붉은 사과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


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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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으러 가는 길 

군대 가는 후배에게 - 박노해

열 여섯 애띤 얼굴로 공장문을 들어선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밥에 몸부림 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쓴 소주 이별잔 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지 말아라 
똑같이 군복입고 똑같이 짬밥먹고 똑같이 땀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많이 배우고 가진 놈들의 치사한 처세 앞에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 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 

빗자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며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따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도 고참이 되는 것 
차라리 저임금에 노동을 팔며 갈수록 늘어나는 잔업에 바둥치는 이놈의 사회보단 
평등하게 돌고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 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을 찾고 만들어라 
돈과 학벌과 빽줄로 판가름나는 사회속에서 똑같이 쓰라린 상처 입은 벗들끼리 
오직 성실과 부지런한 노동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 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속에 하나가 되는 또다른 그대 -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따까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의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따구를 감싸 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 깊이 새기거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노동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에 돌아오라 

눈물을 닦아라 
노동자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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