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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Oct 27. 2020

단풍처럼 분한 일이 있기를

서른 살 가을에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일이다.

대학 졸업 후 타일공으로 오 년 반이나 일을 하다 가서, 그나마 조금 알던 중국어는 다 까먹은 상태였는데, 학교 측에서 갑자기 늘어난 어학연수생을 감당하지 못해 분반 시험을 필기로 치는 바람에 하나밖에 없는 고급반에 배정되어 알아듣지도 못하고 입도 뻥끗 못하고 아주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때였다.


보온병을 들고 끓인 물을 받으러 기숙사 복도를 지나고 있던 참이었는데, 살짝 열린 후배의 방에서 후배 둘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란이 누나가 그래도 공부는 좀 했나봐, 말은 한마디도 못 하던데 고급반 들어갔더라? "
"야, 넌 바보냐, 남편 것 베꼈지."


성격이 고지식해서 커닝 한 번 안 해보고, 빨간 불에 찻길 한 번 안 건너본 나였는데, 남들 눈에 이렇게 보이다니, 갑자기 눈앞이 노래지고,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내가 너희보다 중국어 잘하고야 만다"

결국 3개월 후에 본 어학시험에서 일등을 하기도 하고, 일 년 후에는 교포나 받을 수 있다는 등급을 받기도 했으니, 그때의 결심이 유용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공부하는 내내 그 후배의 말을 되새겼을까? 정녕코 아니다.

나는 그저 매일 아침 차를 곁들인 만두를 즐기고, 오랜 노동 끝에 마주하게 된 활자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분했던 그날, 주먹을 불끈 쥐고 했던 다짐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남 이야기도 하나 해보자.

강사로 일하고 있는 강남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학원으로 돌아가던 때였는데, 골목길을 지나던 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오며 빵빵거렸다.
"골목에서 뭘 어쩌라고 눌러대는 거야"
짜증 어린 얼굴로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대학교 남자 동창생이 서 있었다.  분명 내가 아는 친구였는데, 90kg는 너끈히 나가 보이는 체구에, 허리는 40인치 이하로는 안 보이는 게 아닌가.

15년 만에 만난 반가움은 한마디도 뱉지 않고, 내 입에서는 비명이 먼저 새어나갔다.

"너 어쩌다 이렇게 됐어, 물론 우리가 오래 못 만났으니까 변할 수는 있지만, 이건 오차 범위를 너무 넘어가는 거잖아, 이건 완전 반칙이야."

몇 분간의 호들갑을 뒤로하고 헤어지고 나니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육 개월 후, 학원 데스크에서 나를 찾더니, 어떤 남자가 학원 앞 스타벅스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의아함을 그득 안고 나가보니, 거기에는 전성기로 돌아간 그 친구가 앉아있었는데, 나의 반응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6개월 동안 산악자전거를 열심히 타서 18kg을 감량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도 분했을 것이다, 눈앞이 노래졌던 기숙사 복도에서의 나처럼.

내가 네 앞에 다시 멋있게 서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산을 타는 내내 억울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분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산행이었으나, 차오르는 땀과 함께 흥분되고, 눈앞에 펼쳐지는 수려한 광경에 위로받다가 점차 절로 발이 산으로 향해졌을 것이다.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며, 자신도 더 사랑하게 되고, 포기했던 꿈들을 다시 꺼내어보지 않았을까.


이 가을, 당신에게도 눈앞이 노래지도록 분한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

며칠 안 남은 생애가 분해서 생전 보이지 않던 노기를 힐끗 내비친 단풍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하게 되는 일이 생기기를.

화를 내다 내다 아름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끝내는 가을 산자락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단풍처럼, 당신도 모르던 속의 것들을 다 꺼내어 활짝 피어나는 가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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