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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Jul 29. 2016

만에 하나는 있을 수도 있다

9.11 같은 예외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블루칼라는 화이트칼라보다 죽음과 더 빈번히 마주하게 된다.

나도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5년 반 동안, 직접 목격한 죽음만도 네 건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은 페인트공 아주머니의 추락사였다.


요즘도 여성 건설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듯한데, 내가 현장에서 일할 때는 오직 삼성 건설의 현장에만 남성용 소변기가 층마다 놓여 있었다(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삼성을 좋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른 곳에는 그것마저 전무했으니, 여성 노동자의 배변은 애초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여자 노동자들은 늘 한 층에서 일하는 남자 노동자들의 동선을 파악한 후, 동선이 겹치지 않을 시간대에 으슥한 곳에 가서 얼른 볼일을 봐야 했는데, 그 페인트공 아주머니의 사고는 바로 이 시점에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 전에는 뻥 뚫린 그곳을 휘장으로 가려두곤 하는데, 이 아주머니가 그 휘장을 그저 건축자재 쌓아놓은 걸 가려둔 휘장인 줄로 알고, 얼른 그 속에서 볼일을 보려고 그 휘장을 젖히고 발을 확 내디딘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 타일팀과 건물 앞 공터에서 햇볕을 쬐며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호이스트가 무너진다, 뛰어!"하는 외침이 들렸다.  엘리베이터 설치 전, 자재 운반을 위해 건물 밖에 수직으로 세워놓은 호이스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쪽으로 넘어지는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어, 어!" 하는 우리 팀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호이스트 쪽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무작정 뛰어서 마침 호이스트가 쓰러지는 방향으로 마구 뛰어갔던 것이다.  다행히 호이스트는 내게서 2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넘어졌지만, 많이 놀랐던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은 호이스트 사진이 아니라 타워크레인 사진이다. 호이스트 사진을 찾지 못했다^^, 실은 타워크레인도 가끔 넘어지는 사고가 난다)


평생 그런 일 한 번 없이, 후포리 회장님처럼 명을 다해서 잠자다 편히 생을 마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 없이 좋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만의 하나가 혹시 내 인생에 일어나도 너무 억울하지 않은 생이었으면 좋겠다, 남 얘기하느라 쓸데없이 보낸 시간은 별로 없이 보낸 생이었으면 좋겠다, 너무 해보고 싶던 건데도 다음에 하지 뭐... 하고 미뤄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 번 보면 좋겠다... 하면서 마음에만 담아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쌓아둔 돈만 많고 가본 곳은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 그래... 하면서 읽던 시 한 수를 소개하고 싶다 (모든 말에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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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ㅡ故 이균영 선생께
이희중  


심야에 일차선을 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날들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내일을 위한다는 핑계로는
담배와 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다시 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습니다

아무에게나 속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심야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술친구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습니다
건강한 편견을 갖겠습니다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 라고 바로 지금 말하겠습니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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