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어.)
군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허름한 책이 있어, 집어 들었다. 그냥 무심코 집어 들었다는 말이 어울리는 건, 군에서 발행한 정훈용 책이었기 때문이다. 5~60페이지 될까 말까한 얇은 두께에, 인쇄조차 그저 그런 허름한 쪽이었으나, 군에서 발간한 책으론 어울리지 않게 표지가 분홍이었다.
제목 아래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장교용 도서’
장교들 보라고 만든 책인데, 좀 미안한 말이나, 중대장이나 소대장들이 책을 가까이 하는 걸 보지 못 했고, 또 사병들은 사병들대로 당시의 빡센 군 생활로 인해, 정훈용 책 따위를(?) 읽을 만한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내무반을 굴러다니다가, 결국 폐기 처분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후진(?) 책.
그런데 워낙 책 읽기 좋아하는(?) 필자는, 장교들이 안 읽으면 나라도 봐야지 하는 충성스런 마음으로, 종이 질도 별로고, 인쇄도 조악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웬걸, 그게 아니었다. 엄청난 내용이었다.
읽으면 읽을 수로 빠져들게 되는 내용, 아~ 이런 일이 있었어? 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땐, 약간의 과장을 섞어, 가슴 속으로 감동이 웨이브쳐 들어왔다(이건 백 프로 팩트다). 어떤 외국 부대의 전투 스토리였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읊조렸다.
“아, 대한민국에도 이런 부대가 있었으면...”
당연히 미 해병 1사단이었다. 책 제목도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미 해병 1사단, 장진호 부근의 전투’
한국 전쟁이 터진 지 2달,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은 그 강을 건너기 위해, 국군과 미군은 그걸 막기 위해 벌어지는 공방. 뚫리면 끝장이었다. 부산 뒤쪽엔 바다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제주도로 임시 수도를 다시 옮기고, 주요 요인들도 그곳으로 피난시키자는 얘기도 암암리에 나오던 때다(제주도가 대한민국 수도가 될 뻔 했다). 그 때 맥아더 장군은 도박을 시작한다.
서울 바로 앞, 인천에 대한 기습 상륙이다. 이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한다. 인천을 점령하고 다시 김포 반도, 그리고 서울 탈환! 이 때 맨 앞에서 줄곧 진격하는 부대가 있으니, 그것은 미 해병 1사단이었다. 그러나 그 해병들의 전투는 서울 탈환으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함경도 위쪽의 강계 시(市) 점령하라.”
강계는 평양을 버리고 도망간 김일성과 그 일파들이, 새롭게 정한 북한 수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1사단은 동해안에 상륙, 개마고원으로 올라간다.
때가 겨울 초입이라, 기온이 내려가면서 눈발이 날리기도 했으나, 대원 모두는 낙관적이었다. 강계 함락은 시간문제이고, 그러면 김일성 정권은 끝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해병대원들은 그물 망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스스로 지옥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행군하고 있는 길 양쪽의 산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인영(人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복이었다. 허나 이게 보통 매복이 아니라는 것은 그 매복자들의 수(數)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무려 7개 사단이 매복을! 그리고 3개 사단이 뒤에서 받쳐주고! 일단 7개 사단 12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이, 단지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포위한 것이다.
중공군 제 9병단이었다. 20군단, 26군다, 27군단을 산하에 둔 제9병단! 그런데 이 군단이라는 게 뭔가? 3~4개 사단에다가 수많은 여타 병과 부대까지 데리고 있는 게 군단 아닌가? 그런데 그런 군단이 3개! 그리고 이 3개 군단을 지휘하는 자는 송시륜이었다. 항일전투와 국공내전(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모택동의 공산당과의 전쟁)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휘관!
가운데 인물이 송시륜이다. 중공군 12개 사단을 거느리고 개마고원으로 들어온 지휘관. 사진출처: wikimedia.org
드디어 미 해병대가 포위망에 갇혀 버린다. 그리고 송시륜의 사단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장 좋은 위치에서, 가장 좋은 타이밍을 골라!
“뭐라고? 해병대가 완전 포위돼?”
“그것도 중공군 대 부대에게?”
일본에 있던 미군 지휘부는 물론이고 워싱턴과 펜타곤, 당연히 기절초풍한다. 지구 반대 쪽 모든 게 꽁꽁 얼어붙고 있다는, 한반도 북쪽 산간지방에서 해병대가 포위당했으니, 당장 지원병을 보낼 수 없고, 이거야 말로 큰 일 아닌가?
해병대를 여기 저기 동강내면서 포위한 중공군. 빨간 글씨를 자세히 보면 9병단, 58사단, 59사단에서부터 89사단 등 여러 사단들이 보이는데, 아직 76, 77 두개 사단은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다. 하갈우리와 고토리(지도 맨 아래 쪽) 사이의 hell fire valley, 지옥불 골짜기 우측으로 이동 중이라 생각된다. 사진출처: history.army.mil
당시 미국과 전 세계의 눈이, 한반도 북쪽 함경도로 쏠린다. 반면 북경의 모택동 이하 중공 지도자들은 희희낙락, 기대에 부푼다. 역사상 최초로 미국의 사단 하나를 완전 박살내는 순간이니까. 미 육군보다 터프하다고 알려진 해병대 정규 사단!
더군다나 그게 보통 부대인가? 태평양 전쟁 시, 용명을 날리던 역전의 해병 아닌가? 사단 마크는 다이아몬드 형의 사각형이다(그래서 이 사단의 명칭 중 하나가 블루 다이아몬드다. 또 하나는 올드 브리드 - 오래도록 길러온 우수한 놈들). 그리고 그 안에 남십자성을 바탕으로 숫자가 하나 있다.
1사단이라는 의미의 굵은 ‘1’자다. 그런데 ‘1’자를 자세히 보면, 세로로 알파벳이 적혀 있다.
1사단. 사진출처 : thegunnys.us
GUADALCAL, 과달카날이다.
바로 그 부대였던 것이다. 과달카날에서 정예 일본군을 물리쳤던 그 유명한 부대. 그들이 물리쳤던 일본군 중에, 바로 그 부대가 있었다. 상편에서, 세계의 엘리트 부대 이야기를 할 때 언급했던 일본 제국육군 제2 보병사단.
그럼 여기서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1사단이 포위되기 전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1942년이니까 거의 7~8년 전? 태평양 전쟁이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한 풀 꺾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종합 전력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을 때. 미국을 앞선다는 말에서, 오해가 없길 바란다. 니미츠 제독조차, 이렇게 말했으니까.
“진주만에서 앉아서 당한게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만약 우리가 대양에서 함대전투를 했다면, 더 처절하게 당했을 테니까.”
그리고 일본의 센다이(仙台) 시엔, 부대 하나가 주둔하고 있었다. 대일본 제국 육군 제2 보병사단이다. 알다시피 일본 육군은 용맹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태평양 전쟁 초반까지 패배라는 걸 몰랐다.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사기도 높으며, 죽을 때까지 싸운다. 그리고 그런 용맹심을 바탕으로 하는, 필살의 전법이 있다.
백병 돌격에 이은 육박전. 소총에다 기다란 대검을 꽂고, 부대 전원이 일제히 돌격하면 어떤 적이든 부셔버렸다. 일본이 제2차 대전 시 만든 유일한 기관단총이 있다. 이름하여 백 식(百 式) 기관단총. 그런데 그 짧은 총신 아래에도 대검 꽂는 장치가 붙어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방식인데, 질풍사로 그냥 갈기다가(일본은 자동으로 쏘는 걸 질풍사라 한다), 그냥 육박전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래서 일본 병사들은 대검을 꽂고 돌격하는 훈련을 가장 많이 받았고, 또 자기네의 백병돌격(만세 돌격이라고도 하지만...)에 버틸 수 있는 부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굳게 믿었다. 사진출처: pds19.egloos.com
괜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러, 일 전쟁 때다. 만주와 한반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벌인 전쟁. 만주 쪽에서 양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특히 요양(심양 아래쪽이다.)이라는 곳은 양군 합쳐 36만 명이 포진한 거대 결전지로 변한다.
고구려 시대, 환도성이라 불리던 곳. 바로 그 성 근처에서 일본군 14만과 러시아 22만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일본은 세계 전사에 보기 드문 대담무쌍의 공격을 감행, 이 요양 회전(會戰)을 승리로 이끈다. 야습이었다. 그것도 사단 전체의 야습. 그리고 주역은 일본 육군 제 2사단이었다.
바로 옆에 붙어 싸우던 친위사단이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개피를 보고 물러났을 때, 이 사단은 러시아군이 진을 치고 있던 궁장령을 향해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한다. 무려 1만 명 넘는 병사가 총 끝에 칼을 꽂고 야간 돌격, 아귀처럼 죽고 죽여야 하는 백병전이다.
러일 전쟁 당시의 일본 보병 소총 전열. 사진출처: portsmouthpeacetreaty.org
더구나 야습이라는 건, 병력의 40프로를 일단 접고 들어가야 된다. 1만 명이 돌격하면, 4천 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6천명 밖에 지휘를 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컴컴할 때의 돌격은, 명령 전달도 안 되고, 어디가 어딘 지도 몰라, 일부는 엉뚱한 데로 향할 수 있고, 또 자기편을 적인 줄 알고 마구 쏘아 죽이는 경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필자도 군 시절, 대대규모의 야간 공격을 해봤는데, 정말 정신없었던 기억이 난다.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가는 산악지형에서의 공격이었는데, 적이 어디에 있고, 아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특히 분대원을 데리고 정찰을 갔다 오라는 명령을 받고 산을 내려갔다 올라왔는데, 보고를 받아야 할 중대장이나 소대장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어둡고 텅 빈 능선에 그냥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때 다른 장교와 조우를 하게 되었고, 그 장교는 난리를 친다. “김 하사! 왜 같이 돌격 안 했어? 전쟁터라면 사형이야!” 정찰 나갔다가 돌아온 걸, 전혀 몰라서 하는 그 양반의 헛소리였다. 야간 공격은 혼란스럽고, 그 만큼 어러웠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어른 분들이 하던 얘기가 기억나기도 한다. 물론 과장이 많은 들어간 부분도 있겠으나,
“육박전을 하는데,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이고 어떻게 알아, 머리를 잡고 머리카락이 조금 길었다 싶으면 아군이고, 짧으면 적군이야. 그리고 짧다고 생각한 순간, 대검으로 쑤시고...”, “날이 훤하게 밝으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시체가 그냥 즐비하게 누워 있어...”
일본이 바로 이런 궁장령 야습을 감행한 것이다. 그것도 1개 사단을 동원한 엄청난 야습. 상황이 돌변한다. 야차(夜次)처럼 총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공격에, 러시아 군은 심한 공포감과 함께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진지를 버리기 시작하니까.
그리고 해가 뜨고도 한참 뒤의 오전 11시. 겹겹이 쌓인 양쪽 병사들 시체 위로, 피 묻은 깃발이 날리는데, 그것은 일장기였다. 궁장령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로선 세계 최초의 사단 규모 야습이었고, 유일무이한 성공이었다.
돌진하는 러일 전쟁 시의 일본군 회화. 사진출처: tqn.com
물론 그 뒤의 전쟁인 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은 군단 규모의 야습을 2번씩이나 감행한다. 그러나 병력만 잃은채 작전 실패. 더구나 당시의 전쟁터가 평평한 들판이나 얕은 구릉이었기에, 궁장령의 산악지대와는 위험도에 있어서 비교할 수가 없다. 이 부대가 센다이 시 주둔의 일본 육군 제 2사단이다.
그래서 정예부대로 이름나고, 그 만큼 프라이드도 최고였다. 세상의 어떤 상대하고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미군과 붙어도 무조건 뽀개버린다는 생각. 더군다나 일본 육군은 명치유신 이래 패배가 없었잖은가?
청일 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필리핀 바탄반도에서의 미군과의 전투, 또 싱가폴에서도 많은 수의 영국군을 굴복시켰다. 그 것 뿐인가? 독일과의 전투에서 이긴 적도 있다. 제1차 대전 때 일본은 연합군 편이었고, 그래서 중국 내의 독일 요새, 청도를 공격했는데 비록 소수이긴 하나, 거기서도 일본은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렇다면 양키들이 무슨 문제인가? 자기들은 천황폐하의 군대이며, 그 군대 중에서도 터프하기로 유명한데... 드디어 그 날이 다가온다. 피의 섬, 과달카날이었다.
문제의 과달카날 비행장, 위키피디아에는 '일본군 밑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이 비행장 공사를 했다.'라고 나와 있다. 사진출처: wikimedia.org
사실 일본 입장에선 양키들이 그 섬에서 아주 치사한 짓을 했다. 일본은 호주 공략의 일환으로 공병대가 주둔, 비행장을 만들고 있었는데, 미 해병대가 느닷없이 상륙, 공병들을 다 죽이고 거의 완성단계의 비행장을 강탈해갔다. 이 날도둑 놈들을 요절내고, 섬과 함께 비행장을 되찾을 심산이었다.(일본 전쟁 영화 ‘영원의 제로’에서도 이 부분이 나온다. 양키들이 완성 직전의 비행장을 도둑질 해갔다며, 지휘관이 방방 뜨는 장면.)
물론 처음부터 센다이 사단이 출동한 게 아니었다. 양키들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치키 연대장이 지휘하는 이치키 지대가 먼저 상륙한다. 일 강(江)이라는 곳에서 9백 명이 돌격하는데, 살아남은 건 겨우 수 십 명. 8백 명 이상이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전사한 것이다. 이에 정신이 반쯤 나간(?) 이치키는 휘발유로 연대기를 불태우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두 번째는 좀 더 많은 병력! 가와구찌 소장이 5천 명을 이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이들도 마찬가지, 형편없이 당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 육군. “그럼 좋다! 진짜 싸움꾼들을 보내마!” 센다이(仙台) 부대였다. 무적의 일본 육군 제2보병 사단.
유명한 사진이다. 이치키 지대의 돌격이 무위로 끝난 뒤의 일본군 전사자들. 이곳이 바로 일 강(江)이다. 사진출처: padresteve.com
드디어 일본의 제 2사단은 수송선을 타고,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다. 상륙지점은 미 해병대 주둔지로부터 일부러 먼 해변. 호주 동북쪽에서 조금 올라 간 섬 하나에, 2개의 터프한 부대가 포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치키 지대나 가와쿠치 지대처럼 정면 돌격은 하지않고, 정글을 뚫으며 멀리 우회, 문제의 비행장 외곽까지 진출, 거기서 회심의 돌격을 감행한다.
미국과 일본, 정예끼리의 대결!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마찬가지였다. 센다이 사단 역시 박살난다. 진짜 싸움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백병 돌격의 고수라 하는 일본육군이, 임자를 만난 것이다. 뒤이어 여러 차례의 전투가 이어졌지만, 마찬가지 결과. 그리고 패잔병이 되어 정글 속에 숨어 있다가, 몇 달 후 섬을 빠져나간다.
미군에게 들킬까봐, 야밤을 택한 탈출. 제 2사단을 포함해 무려 3만 5천의 일본군이 투입됐는데, 6개월간의 전투 끝에 생존자 겨우 1만. 그러나 그 1만 명도 그냥 탈출한 게 아니었다. 보급의 두절로 앙상한 몰골로, 폐인이 되어 나갔다.
바로 그 역전의 사단이 이번엔 정글이 아니라, 눈발이 휘날리는 개마고원 아래쪽에서 완전 포위된 것이다. 중공군 3개 군단 휘하 10개 사단한테.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혈로를 뚫으며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까지의 후퇴. 그 곳은 흥남이었다. 수송선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
눈으로 뒤덮인 함경도 산 속에서, 한쪽은 탈출하기 위해, 한쪽은 포위망 속 사냥감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름하여 초신(chosin) 전투.
초신이라는 단어는, 일본 지도 속 지형 이름. 당시 한국엔 지도가 없어,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놨던 일본 지도를 사용했는데, 거기에 표시된 게 바로 그 지명이었기 때문이다.(장진호의 장진을 일본말로 하면 ‘초신’이다.) 그래서 이 전투를 미군에선 정식으로 ‘초신 전투’라 부른다.
당시 개마고원 아래 쪽에서의 1해병 사단, 철모의 얼룩무늬로 해병대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출처: wikimedia.org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 역사상 최초로 미군 1개 사단 전멸?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중공군 7개 사단과 뒤쪽 3개 사단이 개피를 본다. 송시륜의 3개 군단 산하, 10개 사단이... 포위망 속의 1개 해병사단한테!
그런데 이들 해병은 포위망을 뚫을 때, 같이 동행하는 게 있었다. 찝 차 위에 실려 있는 시체였다. 꽁꽁 언 전우들의 시체. 물론 임시 비행장을 만들고, 중간에 많은 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공로(空路)보내기도 했지만, 비행장이 폐쇄된 뒤의 전사자 유해도 그냥 두지 않았다. 전우의 시체는,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다는, 미 해병대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다.
더군다나 이 사단의 모토가 무엇이던가?
"No Better Friend, No Worse Enemy(전우처럼 좋은 놈이 없고, 적군처럼 나쁜 놈이 없다)!"
그 좋은 놈들을 적군 손에, 넘겨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더욱 놀라운 게 있다. 잘못된 시기와 잘못된 상층부의 판단과,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0도로 내려가는 이 끔찍한 곳에서 기적을 만들어 낸 해병대원들. 반 수 이상이 예비역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식으로 하면 향토 예비군들!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군복을 벗고, 고향과 일터로 돌아간 전직 해병들. 그들이 다시 소집돼 한반도의 저 북쪽 함경도에서, 그런 인크레디블한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물론 이 인크레디블한 전투를 해병대만이 홀로 한 건 아니었다. 동해의 항모 갑판으로 날아오는 F4U 콜세어, 일명 휘스퍼링 데드(whispering death), 속삭이며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의미로, 엔진소리가 요상하기에 일본 파일럿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이 전투기의 끊임없는 지상 공격이 있었고, 또 소규모이나 다른 부대들도 있어, 이들도 전투를 같이 했다.
미 해군과 해병의 항공대가 사용한 F4U 콜세어, 엔진 파워가 좋아, 당시 일본의 쌍발 폭격기보다 폭탄 탑재량이 많았다. 사진출처: wikimedia.org
미 육군 7사단의 연대 전투단 하나에다가, 소수의 한국군. 그리고 조금 특별한 부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제2차 대전 당시 전설적 특공부대, 영국의 코만도였다. 영국 육군의 제 41코만도.
필자가 어릴 때 본 한국전쟁에 대한 두꺼운 책이 있다. 번역본으로서 제목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마 그냥 ‘한국전쟁’이라는 단순한 제목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원래의 제목만큼은 기억이 또렷하다. 당시로선 이해가 잘 안 됐기 때문이다.
"디스 카인드 오브 워(this kind of war)"
의역을 하면 ‘이런 식의 이상한 전쟁’ 정도?, 조금 과장을 붙이자면 ‘늬들이 이런 전쟁을 알어?’
서양인이 보기에도, 한국전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하고 이상한 전쟁이었나 보다. 무수한 산과 계곡에다, 논과 밭. 그리고 여름엔 무지 덥고 겨울엔 무지 춥고(그 당시 날씨가 특히 그랬다), 거기에 북한의 농민병들과 중공군들은 왜 그리 억센지...
사진 설명엔 이렇게 나와 있다. 한국 전쟁 시, 영국의 제 41코만도가 북한의 철로를 폭파 작업 중이라고... 그리고 41 코만도 사를 보면 이런 것도 나온다. ‘한국 해병대와 함께 북한 해안에 침투, 특공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진출처: wikimedia.org
더구나 그 억센 놈들이 떼를 지어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고... 또 초반에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다가, 이내 그 징그러운 고지 쟁탈전이 시작된다. 산과 능선 하나를 두고 무수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뺐고 뺐기는 출혈 만땅의 고지전(요즘 국내에서 이 책, 재출판 된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그 책에서도 초신 전투를 다룬 부분이 있었는데, 당시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읽었으나, 어쨌든 그 전투 항목 중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그 코만도 부대에 대한 에피소드다. 모진 추위 속에서, 이제 다시 군장을 차리고 후퇴 준비를 하는데, 저쪽 산 능선으로부터 총소리가 들려온다. 중공군이었다. 그들이 분명 이곳을 보고 쏴대는 총탄들. 그런데 이 코만도 친구들, 전혀 개의치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군장을 싸면서도, 하던 농담 계속하고, 킬킬거린다.
영국 특공대도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영하 2~30도의 눈 덮인 산하, 동상과 설사로 고생하며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는데, 주위엔 중공군이 우글우글, 그래서 그들의 인해전술 공격으로 인해 얼어 죽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두 가지 중 하나가 되기 십상인데도, 저격수의 총알 속에서 여유부리며 서로 농담 따먹기. 그러니 이들이 그 전설의 아크나칼리(이들의 훈련지)에서 훈련받고 나온 코만도지.
포클랜드 전 때의 영국 코만도 부대인데, 위에 언급되었던 제41코만도는 아니고 45코만도다. 사진출처: militaryimages.net
그런데 만약 이 전투에서 해병들이 일찍 망가졌다면, 한반도 전세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는 몹시도 암울한 시기였다. 전쟁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고, 희희낙락 북한 깊숙이 진격했던건 잠시일 뿐,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으로 인해, 곳곳에서 포위가 되어, 궤멸되거나, 필사적 탈출. 당연히 평양도 지키지 못하고 포기한다. 그런데 평양만 내줬나? 서울까지 내준다. 지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다시금 서울을 뺐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수원 근처까지만 내려오곤 진격이 스톱된다. 그들의 남침 동력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전진은 할 수가 없었다. 보급선이 길어진 게 그 이유였고, 또 하나는 저들의 한쪽 날개였던 9병단 예하 3개 군단이 ‘초신 전투’에서 무력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UN군은 다시 한 번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개시, 서울을 재차 탈환하고 한반도 허리까지 전선을 끌어올린다.
개마고원 장진(초신)호 아래 쪽 전투, 눈 덮인 유담리와 신흥리, 그리고 후동리와 하갈우리의 전투, 또 그 아래 쪽 고토리에서의 혈투. 그 곳에서 피를 흘린 미 해병대원들의 감투가 그런 힘을 받게 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고비, 고비마다 흐름을 바꾼 부대...
미 해병 제1사단. 하나는 인천상륙에 이은 서울 탈환, 또 하나는 중공군이 밀고 내려올때 그들의 날개를 한 쪽을 꺾어버린 것. 그런데 사단 사에 있어 전쟁의 흐름을 바꾼게 어디 이때 뿐인가? 7년 전에는 태평양전의 흐름을 바꿔놨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후, 미 육군 참모총장 마셜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용맹한 해병대의 결사적 전투와, 해군 기동부대의 헌신이 태평양에서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일본 역시 이런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육군의 참모본부 차장 ‘카와베’는
“태평양 전쟁을 크게 놓고 봤을 때,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하는 시기가 있었다. 바로 그 분기점이 과달카날이다.”
파푸아뉴기니령, 라바울의 참모였던 오오마에 대령도 마찬가지였다.
“과달카날을 잃었을 때, 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패배한다는 생각도 안 했으나, 어쨌든 승리에의 가망성은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미 해병 제1사단에게, ‘현존하는 세계 최강의 (단위)부대’라는 트로피를 씌어도, 그리 큰 하자는 없지 않을까? 이후에 치러지는 그들의 베트남전 이후의 시(市) 탈환이나, 걸프전 당시 카푸지 전투, 또 지금의 이 21세기 초두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9.11 이후 이라크 재 침공 작전의 오피셜 네임이다)에서의 바그다드 함락 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의 숱한 시대, 숱한 전쟁터에서 용명을 날린 단위 부대는 꽤 있어도, 그 전쟁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꾼 단위 부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그런데 이 부대, 지금은 뭘 하는가? 어디에 있는가?
그 최강의 부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자 백인 할아버지들의 도시라 불리는 미 서해안 캘리포니아 주, 샌 디에고에 자리잡고 있다. 평균 기온이 13~20C 정도로 물가가 비싼거 빼곤 겁나 살기 좋다는.. 캠프 이름은 펜들톤, 전사(戰士)의 휴식이며 전쟁을 염두에 둔 휴식이다. 언젠가 다시 전투에 뛰어들,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채.
캠프 펜들톤. MEF는 I Marine Expeditionary Force ; I pronounced One 란 뜻이라고... 사진출처: militaryimages.net
그리고 이 부대에겐, 항상 출동 1순위에 집어넣고 있는 지역이 있다. 바로 한반도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시, 하와이에 있는 즉각 대응 부대인 제25경보병 사단과 함께, 출동하게 되어 있으니까.
다시금 한반도에?
그렇다. 이 올드 브리드들은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 했을시, 긴급 출동할 최중요 사단이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5의 제목이 ‘엠파이어 스트라익스 백(Empire Strikes Back)’이던가? 그렇다면 이 경우는 ‘올드 브리드 스트라익스 백’이 될테다. 중공군 9병단 10개 사단의 ‘훼파자(毁破者)’ 올드 브리드의 귀환.
물론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기는 녹 쓸어 가는데, 인민들은 집단 영양 부족에 허덕이고, 믿었던 군의 모랄(사기)마저 다운 돼가는 작금의 북한, 그런데 자기들보다 50~60배 확장된 국력의 대한민국과 전쟁을 결심하고,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또 거기엔 미 해병 1사단 같은 부대들이 더해지고), 우주 속 혜성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지구 대기권을 뚫고 떨어져, 아마겟돈의 날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퍼센티지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득 글을 끝맺으려하니.. 모형 비행기를 손에 들고 훈련하던 조종사들이.. 떠오른다..
어쨌든 이 미 해병 1사단의 존재와 살펴본 그들의 커리어는 꽤 든든한 마음이 들게하지 않는가? 퍼센티지가 극히 낮다고 해도, 북한이라는 무장 집단과 오도된 체제의 존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분명한 현실이고, 또 그들과의 공간적 거리는 그리 먼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