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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리 Jul 05. 2024

아프다는 건 감사한 일이야

날씨가 화창한 늦은 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계절이다. 이런 날씨에 집에만 있는 건 아무리 환자라지만 참을 수가 없다.


그즈음 부산에 사는 아는 동생이 친구들과 놀러 오라고 했다. 사실, 꽤 예전부터 얘기가 나왔지만, 마음의 결정을 못 내려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동생 집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도, 여행 가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맛있는 안주에 술 한 잔을 곁들이는 것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는 사이, 비행기는 매진되고 기차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 서둘러 2박 3일 여행을 확정 지었다.


부산역에 도착하고, 우리를 데리러 온 동생이 해운대 바다에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바다에서는 화장실 이용이 자유롭지 않아서 불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서 간단하게 요리해 먹자고 했다. 같이 요리하는 게 얼마나 추억이겠냐며. 친구들이 마실 술과 내가 마실 포카리스웨트를 담았다. 후식으로 친구들이 먹을 라면과, 내가 먹을 건과일칩도 담았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차 타기를 망설이고 있었더니 친구가 차 멀미를 하는 거냐며 앞자리를 양보해 줬다. 고… 고마웠다. 얼떨결에 차에 타고는, 안전벨트가 배를 누르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질까 봐 양손으로 벨트를 쥐고 살포시 들어 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반갑고 신나는 척했지만, 신경은 온통 딴 데 가 있었다. 부산역에서 동생네 집까지는 차로 40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놓인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보며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 버틸 수 있다고 되뇌었다.



집에 도착해서 친구들은 치킨과 마라탕을 주문했다. 배달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속이 안 좋은 나를 위해 친구가 앞치마를 둘렀다. 냄비에서 육수를 끓이는 동안, 도마 위에 알 배추와 소고기를 겹겹이 쌓아 올렸다. 그리곤 한입 크기로 썰어서 냄비를 둘러 가며 채워 넣었다. 자글자글한 육수가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쯤, 숙주와 쯔유를 넣고 뜸을 들였다. 식탁 위에 올려서 냄비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한 김이 피어올랐다. 밀푀유나베라는 처음 보는 요리였는데, 자극적인 걸 못 먹는 나에게 딱이었다. 뽀얗고 따듯한 국물에 푹 익힌 야채들은 속을 편하게 해 주었다. 동시에 연두부와 계란찜도 준비됐다. 덕분에 걱정했던 것보단 편안하게 부산 여행 첫날을 마무리했다.



둘째 날 아침, 집 앞 개울가에서 다 함께 동생네 강아지를 산책시켰다. 배가 아픈 뒤로 오랜만의 산책이었다. 경관이 아름다운 곳들은 대체로 큰 건물이 없어서 그간 자연을 기피해 왔는데, 여기는 길을 따라 카페 거리가 조성되어 있어서 화장실 걱정을 안 해도 되었다.


개도 나도 즐거운 산책을 마친 뒤, 늦은 점심으로 바닷가 근처의 식당에서 생선구이를 먹었다. 식사 후에는 차로 1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를 가기로 했다. 부산이 원래 이렇게 큰 도시였나? 어디만 갔다 하면 차로 30분은 기본이었다. 밥 먹고 나면 바로 배가 아파질 텐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혼자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 식당에서 나올 때가 되니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그래도 진짜 걸어갈 거냐고 되물었다. 나는 응! 하며 씩씩하게 답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커다란 우산을 하나 샀다. 비 오는 날 바닷바람은 제법 매서웠다.



지도를 보며 한참을 걸었다. 배가 아프면 언제든 화장실을 갈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는데, 어쩌다 보니 후미진 길목으로 들어와 버렸고 주변은 건물 한 채 없이 휑했다. 그때부터 불안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하나, 가던 길로 계속 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정말 우연히 케이블카 탑승장을 발견했다. 그러니 주변에 건물이 없을 법했다. 그나저나 탑승장은 규모가 제법 컸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을까? 아무튼 다행히 관광지라 화장실은 넉넉히 있었다. 그리고 여차저차해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차로 10분이면 간다고 했는데 어느새 1시간 쯤 됐던 것 같다. 걷다 보니 산길을 따라 조성된 길이 나왔는데, 비가 잦아들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면서 몽환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숲에서 요정이든 정령이든 선녀든 등장한다면 뒤에 깔릴 법한 배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숲처럼 조금은 어둡고 신비로운 느낌까지 들었다. 이때 처음으로 배가 아파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친구들이랑 차 타고 갔으면 이런 풍경은 못 봤겠지? 좋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친구들이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얼마나 기다린 건지, 친구들 앞에 놓인 음료는 얼음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술을 마시자, 바다를 보자, 이야기가 많았는데 부산 깡통시장에 가기로 했다. 나는 이번에도 속이 안 좋아서 지하철로 이동하겠다고 했고, 친구들은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시간 맞춰 출발하겠다고 했다. 카페가 외진 곳에 있어서 지하철역까지만 차를 타고 이동했다.


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려고 보니, 아뿔싸, 핸드폰이 없었다. 충전기에 꽂아놓고는 두고 내린 모양이었다. 지하상가에 있는 가게 사장님께 전화를 빌려서 내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요즘 세상에 핸드폰 빌려달라고 하면 수상하게 보실 줄 알았는데, 흔쾌히 빌려주셨다. 곧바로 돌아온 친구에게 핸드폰을 건네받고, 사장님께 드릴 조각 케이크를 샀다. 어르신 입맛을 고려해서 밤맛으로. 케이크를 가지고 내려오니 그새 불이 꺼져 있었다. 날이 더워서 문 앞에 두고 갈 수도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핸드폰에 번호가 찍힌 게 생각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 방금 핸드폰 빌렸던 사람이에요. 감사한 마음에 케이크를 사 왔는데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혹시 퇴근하셨어요?”

“하하,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는데 고마워요. 마음만 받을게요, 케이크는 학생 먹어요~”

모든 게 꿈 같았다. 천사를 만난 건가?



지하철을 타고 전포에 도착했는데, 친구들은 아직 오는 중이라고 했다. 비도 오고 해서 근처에 있는 엽서 가게에 들어갔다. 마치 도서관처럼 되어 있었는데, 종이 냄새와 잔잔한 음악이 어우러져서 무척 평화로웠다. 그러다 문득, 배가 아픈 게 감사했다. 덕분에 신비로운 숲길도 거닐고, 지하상가 천사도 만나고, 지금 이렇게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배가 아픈 건 괴롭기만 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구나. 수백 장의 엽서 사이에서 변기가 그려진 엽서를 발견했다. 바로 계산을 하고, 가게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 앉아서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다 친구들을 만나 깡통시장으로 이동했다. 마땅한 가게가 없어서 매대에서 산 음식을 길가에 서서 먹는 방식이었다. 화장실이 없다고 생각하니 또 불안해졌다. 도망치듯 시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시장 주변에 카페가 많았던 것 같은데, 밤이 늦어서인지 갈 만한 데가 없었다. 옆에 있는 상인에게 물어보니, 내 속을 알 리 없는 상인은 “저쪽이요” 하며 대충 제스처를 취했다. 상인이 가르킨 쪽으로 갔는데 화장실이 없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친구들이 씨앗호떡을 사 들고 나왔다. “호떡 먹을래?” 하는 해맑은 물음에 그냥 아무 일 없는 척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 적당히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침대 위에서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사실 차멀미를 하는 게 아니라 화장실을 못 가면 불안한 거라고. 새벽 감성에 괜한 소리를 꺼낸 걸까 했는데, 친구는 자기 일처럼 함께 고민해 주었다.



정말 많이 걱정했던 부산 여행이었다. 아무리 불편을 감수하는 게 익숙하다고 해도, 친구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장소, 음식, 이동 방식 등에 제약이 많은 나를 위해 친구들은 희생해 주고 배려해 주었다. 많은 즐거움을 포기했음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나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런 친구들 덕분에 죄책감 가득한 시간이 아닌, 배가 아픈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 나보다도 나를 더 아껴 주는 사람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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