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여정은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될 예정이었다. 15분을 걷고, 지하철을 타서 5개 정거장을 가다가, 환승해서 14개 정거장을 간 뒤에 다시 10여 분을 걸어야 했다. 제법 험난할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 환승하고 두 정거장 만에 자리가 났으니 말이다! 이 말인즉, 남은 12개 정거장은 편하게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아파졌다. 편안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만 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지하철을 타려고 보니 다음 열차는 20분이나 기다려야 한단다. 지하철 배차 간격이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이윽고 도착한 열차에 올라탔다. 문 앞에서 승객들을 쭉 스캔한 뒤, 금방 일어날 것처럼 전광판을 힐끔거리는 분 앞에 섰다. 예상 적중.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그분이 내릴 채비를 했고, 자리가 생겼다. 아니, 생기려다 말았다. 앞 사람이 채 일어서기도 전에, 옆에 계신 아주머니가 나를 밀치고 내 앞에 앉았다.
뭐지? 원래 내가 앉았어야 할 자리인 건 그렇다 치자. 내 모습이 겉보기엔 멀쩡해 보인다는 게 너무 짜증 났다. 내가 젊고 건강해 보이나? 다리에 깁스라도 감았어야 했나? 얼굴에 환자라고 써 붙이고 다녔으면 내 자리를 안 뺏었을까? 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잔뜩 예민해졌다.
30분을 넘게 서 있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도 나랑 같은 역에서 내렸다. 그래, 저분도 사실은 몸이 안 좋았다거나,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 내릴 때 멋쩍은 웃음이라도 보여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분은 애써 내 눈을 피할 뿐이었다. 지하철에 내 자리, 네 자리가 어디 있겠냐마는 힘든 몸을 이끌고 한참을 서 있다 내리니 왜 이리 억울한지. 그날따라 하필 에스컬레이터도 고장이다. 젠장. 화장실 한 번 간 게 이렇게 큰 사태를 불러일으키다니.
배가 아픈 뒤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시외버스는 고속도로를 타면 화장실이 없어서 탈락. 기차는 화장실 칸수가 너무 적어서 탈락. 시내버스는 내렸을 때 화장실이 없을 수도 있으니 탈락. 택시는 중간에 내려달라고 하면 죄송스러워서 탈락.
결국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중교통은 지하철이었다. 역마다 화장실이 있고, 휴지도 있고, 칸이 넉넉하다. 길 한복판에서 차창을 두드리며 내려달라고 소동을 일으킬 필요도, 정류장 앞 카페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음료값을 지불할 필요도, 15,000원어치의 이동을 약속해 놓고 4,600원 지점에서 내리게 되어 죄송하다며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지하철 이용이 제일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하철 플랫폼에서 화장실까지가 너무 멀다. 카드를 찍고 나가야만 화장실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개찰구에서 동그란 버튼을 누르고 역무원에게 “잠깐 화장실 갔다가 다시 타려고 하는데, 문 좀 열어 주실 수 있나요?” 하며 민망한 부탁을 해야 한다. 물론, 거기까지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갑자기 바지에 똥을 싸면 버스나 택시는 내릴 수라도 있는데, 지하철은 꼼짝없이 그 칸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럼 ‘지하철 2호선 똥녀’로 그날 밤 9시 뉴스에 나오게 되겠지.
개찰구 안에 화장실이 있는 곳을 미리 검색해서 저장해 놓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떤 역들은 역 간 이동이 무려 6분이나 걸렸고, 어떨 땐 앞선 열차와의 간격을 조정한다며, 역에 도착해서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리고 까탈스러운 내 장은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다가도, 운행만 시작하면 아파졌고, 다음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면 다시 안 아파졌다.
결국, 내 마지막 남은 교통수단이었던 지하철마저 못 타게 되니, 더이상 탈 수 있는 게 없다. 하… 어딜 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걸까. 아, 순간이동을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