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어릴 땐 서로의 집에도 놀러 갈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단톡방에서 약속 장소를 정하는데, 친구 중 한 명이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쭉 살아오던 집에서 조만간 이사를 갈 예정이라, 추억을 되새길 마지막 기회라며. 초등학교 때 이후로 간 적이 없으니, 무척 의미 있는 방문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20여 년 만에 방문한 친구 집에서 똥을 싼다? 어림도 없지. 결국 ‘그날 짐이 좀 많아서 캐리어를 끌고 가야 할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역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여전히 속은 좋지 않았지만 ‘역 근처니까 괜찮다’, ‘요즘 나 괜찮다’ 하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주문은 효과가 있는 듯했고, 그렇게 마음을 비운 채 약속 당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컨디션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약속 몇 시간 전, 갑자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뭐지? 문제 될 만한 음식을 먹은 건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간이 다 돼서 출발해야 했다. 등에 백팩을 메고, 어깨에 에코백을 걸치고, 손에는 종이가방까지 들었다. 짐은 많고, 서서 가고, 기운은 없고, 신경이 곤두섰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정신 바짝 차리자. 엉덩이에 힘 빡 주고!’
그러나 내 몸은 마음 같지 않았다. 결국 지하철역에서 화장실을 들러야만 했다. 진이 쭉쭉 빠지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유튜브를 보기 위해 핸드폰을 들 힘조차 없어서, 그냥 음악만 틀어놓고 멍을 때렸다.
지하철역에서 식당까지는 걸어서 15분, 버스로는 한 정거장이었다. 1초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버스가 눈앞에서 떠났다. 뛰어서 잡아볼까 했지만 그럴 에너지가 없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갑자기 토독토독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칠 기운이 없어서 그냥 비를 맞으며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신나게 메뉴를 정하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친구들은 이내 갸우뚱하며 캐리어는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만큼 챙길 게 없더라며 둘러댔다. 친구들은 그러면 집에서 볼 걸 그랬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얼른 다시 날 잡자.”
“너무 좋지!”
사실 안 좋다.
“우리 부모님도 너네 보고 싶어 하셔~”
“정말? 나도 뵙고 싶어!”
사실 안 보고 싶다.
친구네 집에 가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가족들까지 있다고? 상상만 해도 불편해… 아, 나는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은 특이하게도 간이 건물처럼 세워져 있었는데, 건물 내에 화장실이 없어서 옆 건물까지 가야 했다. 배가 아플 때 출발하면 늦을 것 같아서, 신호가 오기 전에 미리 화장실을 가야겠다 싶었다. 안 그래도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 텐데, 이동 시간까지 더하면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것 같았다. 긴 공백을 무슨 핑계로 둘러대야 할지, 식사 시간 내내 그 고민만 했다.
이럴 거면 왜 왔을까. 아니다, 약속을 취소하는 게 더 불편했을 거다. 말이 좋아 이십년지기 친구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니까. 나와는 성향이 너무 달라서 배가 아프다고 하면 이해해 주기보다는 어색해졌겠지.
돌이켜 보니, 그래서 약속 직전에 갑자기 아파졌나 보다. 분명 멀쩡했는데 갑자기 아파졌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공통적으로 이후에 불편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무의식 중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듯했다. 하다 하다 이젠 무의식까지 나를 괴롭게 하는구나.
언제 아플지 몰라서 늘 불안해야 하고, 언제까지 아플지 몰라서 희망도 없는 이 삶을 도대체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