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나의 꿈이자 모두의 꿈이었다. 대학생 취업 희망 기업 Top 10 안에 항상 드는 곳. 나 역시도 그 회사로의 취업을 꿈꿨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문턱은 높았고, 그렇게 나와는 인연이 아닌 듯했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그 회사에 미팅을 가게 된 것이다! 중요한 거래처가 될지도 모르는 자리라 팀장님에 전무님까지 함께했다.
택시에서 내리며 바라본 사옥은,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곳답게 으리으리했다. 건물 끝이 하늘에 걸려 있을 정도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그곳은 경비마저 삼엄했다. 사전에 담당자를 통해 출입 등록을 해 두었는데, 안내 데스크에서 2차로 방문 등록을 해야 했다. 지시에 따라 신분증을 맡기고 임시 출입증을 받았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체면을 지키기 위해 참았다. 미팅 장소는 19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층수를 누르기 위해, 19층에 입장하기 위해, 수시로 출입증을 태그해야 했다. 모든 순간이 신기했다.
너무 신났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미팅 전에 화장실을 들르지 못했다는 것. 점심도 안 먹고 컨디션 관리를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배는 아픈데 똥을 못 쌌다. 미팅 장소에서 화장실을 들르려고 했는데, 차가 막혀서 미팅 직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그렇게 타이밍을 놓친 채 미팅이 시작됐다. 회의에는 전혀 집중하지 못했고, 1시간 내내 화장실 생각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미팅룸까지 오는 길에 화장실을 못 봤는데, 카드를 찍고 나가야 있는 건가? 첫 대면인데 미팅 중에 화장실을 가면 실례겠지? 참을만한가? 참을 수 있나? 못 참을 것 같기도 하고. 곧 미팅이 끝날 것 같은데 미팅 다 끝나고 가야 하나? 미팅 끝나면 잠시 화장실 다녀올 테니 앉아서들 기다리시라고 해야 하나? 그럼 좀 무례한가? 어라, 다들 일어나시네. 지금이라도 다녀온다고 할까? 이미 일어났는데 기다리시라고 하면 좀 그렇겠지. 거래처 분들 가시면 그때 화장실 간다고 할까? 설마 1층까지 같이 가시진 않겠지?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거래처 분들은 우리를 배웅해 준다며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고, 1층을 눌렀다.
내가 1층까지 가는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19층에서 1층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1층에 내리면 바로 화장실 있던가? 인사를 하고 가야 하나? 설마 택시 타는 곳까지 따라오시진 않겠지?
“저 여기서 내려서 화장실 좀 들러도 될까요?”
엘리베이터는 다른 승객을 태우기 위해 14층에 멈췄고, 과부하가 온 뇌로 인해 나도 모르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뱉었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거래처 직원은 “1층에도 화장실 있어요”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뭐라 해명할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엔 적막만이 흘렀다. 1층까지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이 지옥 같았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전무님이 던진 농담에 멋쩍게 웃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은 화장실은 저쪽이라며 안내했다.
내가 많이 급해 보였나? 첫 미팅인데 이게 무슨 낭패냐. 나 때문에 거래가 잘 안되면 어쩌지? 내가 화장실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려나?
화장실에 갔다가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거래처 직원은 이미 가고 없었다. 답답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 편한 전무님과 팀장님은 근처의 유명 빵집에 들르자고 했다. 신나게 빵을 고르는 그들을 보며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서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허탈했고, 죽고 싶었다. 양손 가득 빵을 산 그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이제 사무실에 가자고 했다. 택시 안에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저… 배려해 달라고 하는 것 같을까 봐 그동안 계속 참았는데, 앞으로 출장 다니기 좀 힘들 것 같아요…”
머릿속이 복잡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힘들게 이야길 꺼냈다. 왜 그러냐고 하면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그래. 힘들면 그래야지.”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차 안은 가쁘게 몰아쉬는 내 숨 소리만 들릴 뿐, 엘리베이터에서처럼 고요했다. 회사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야속하게도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몸 안 좋아서 출장은 못 간다더니 친구랑은 잘만 놀러 다니네’라고 생각할까 봐 신경 쓰였지만, 집에 혼자 있었다가는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서 꾸역꾸역 친구를 만나러 갔다.
미리 약속한 대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갔다. 테이블이 몇 개 없는 작은 가게였는데, 운 좋게도 그 연예인이 테이블마다 직접 서빙해 주었다. 팬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싶었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화장실 위치를 묻는 게 수치스러워서 화장실을 참느라 괴로웠다.
밥 먹는 내내 화장실 생각만 했다. 식사 마치면 식당에서 가까운 카페를 갈지, 역에서 가까운 카페를 갈지 고민했다. 어차피 이동하는 거리는 똑같은데 언제 이동하느냐 차이였다. 고민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져서 그냥 친구에게 몸이 안 좋아서 집에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친구는 아프면 집에서 쉬지 그랬냐며 깜짝 놀랐다. 그러게... 친구가 다른 약속 잡을 수도 있었는데 내가 애매하게 시간을 뺏었나? 내가 너무 우울하게 있어서 오히려 민폐였나? 몸이 아픈 뒤로는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지하철을 타려고 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얼마 안 가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이제 내가 탈 차례였다. 그런데 도무지 지하철에 탈 자신이 없었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낭떠러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발짝만 떼면 되는데, 그게 안 됐다. 내 뒤에 있던 승객들이 나를 앞질러 지하철에 탑승했다. 승객들을 모두 태운 열차는,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두고 승강장을 떠났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다시 나와서 택시를 타러 가는 길이 너무 괴로웠다. 그동안은 아파도 씩씩하게 지낼 수 있다고 자신해 왔는데, 모든 다짐이 무너졌다. 다 부질없었다. 소소한 행복에 집중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사람들이 모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찾을 때도, 세상의 소리를 듣고 싶다며 항상 한쪽 귀는 열어 놓던 나였다. 에어팟 안 사도 돼서 돈 굳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했었는데, 오늘따라 세상과 단절되고 싶어서 양쪽 이어폰을 모두 꽂았다. 볼륨을 높인 채 차창에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부디 오늘만 우울한 것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