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사-집-회사만 반복한 지도 10개월이 지났다. 이제 좀 괜찮은가 하면 여지없이 불안한 순간들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사람들과 만나지도 못하고, 만난다 해도 맛없는 음식만 먹는 시간들은 이미 한참 전에 지겨워졌다. 나는 재미없는 걸 잘 견딜 뿐이지, 무료한 삶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전생에 해바라기였나 싶을 정도로 햇빛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실내에 갇혀 지내는 나날들이 너무 괴로웠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그나마 다행이라며 합리화하는 일에 질려 버렸다. 하루하루 메말라 갔고, 고통에 기약이 없음에 분노했다.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해서 예민해졌고, 먹은 게 없다 보니 금방 피곤해졌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순간순간 내 컨디션을 확인할 필요 없이 마음껏 웃고 떠들고 싶었다.
더 우울해지기 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보기로 했다. 정신과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다른 일로 심리상담을 받아 본 적이 있어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예전에 받았던 심리상담은 지자체 지원을 통해 무료로 진행했던 거라, 이번에도 그런 게 있을까 하고 알아보았다. 감사하게도 서울시에서는 최대 3회까지 정신과 진료비를 지원해 줬다. 초진은 100% 무료로 진행하고, 환자 상태에 따라 추가 진료를 결정하는 방식이라 부담도 없었다.
찾아보니 의외로 주변에 정신건강의학과가 많았다. 정신과 특성인지, 리뷰가 거의 없어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하나를 골랐다. 정신과에 거부감은 없었지만서도, 막상 가려니 괜히 떨렸다. 심리상담처럼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지, 내과 진료처럼 증상만 말하고 바로 처방을 받는 건지 아리송했다. 다행히 대기 손님이 없어서, 이왕 힘들게 왔으니 내 상황을 다 털어놓아 보자 싶었다. 숨을 깊게 후우 내쉬고 입을 열었다.
“집에만 있으니 무기력해요.”
“왜 집에만 계세요?”
“화장실이 없으면 불안해서요.”
선생님의 말씀은 대충 이랬다. 나는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내 장 상태, 내 감정까지도 이성적으로 컨트롤하려고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거라며, 처음엔 외부 사건으로 인해 배가 아팠겠지만, 내 뜻대로 장을 통솔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상태가 더 악화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선생님, 저는 왜 강박이 심한 걸까요?”
“그건 안 중요해요. 그냥 지금 이런 상황이라는 게 중요하죠. 그래도 이 정도면 증상이 심각하지도 않고, 엄청 흔한 병이에요. 약 처방해 드릴까요?”
“그냥 제가 마음먹기 나름인 거라면, 약 안 먹고 치료할 수는 없나요?”
“약을 안 먹는 건 제주도를 걸어서 가는 것과 같아요. 언젠가 치료는 되겠지만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죠. 약 먹으면 바로 낫는데 굳이 안 먹을 이유가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한약을 지어서요. 그거 다 먹고 처방받아도 될까요?”
“아, 한약 드시는구나…”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해졌다. 한방(정통의학)과 양방(현대의학)의 사이가 안 좋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바로 정색하실 줄은 몰랐다. 내가 그들의 암묵적인 룰을 깨 버린 건지, 말실수를 한 듯 부담스러웠다. 선생님은 한약을 당장 끊으라고 했고, 바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도 강박이라며 가스라이팅을 했다. 물론 나도 한약의 효과가 애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서도, 무언가 기분이 좋진 않았다. 도무지 눈치가 보여서 약을 처방받지 않기로 하고 나왔다. 그래도 제법 용기 내서 간 정신과였는데, 다시는 안 가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내가 아픈 게 심리 문제였구나. 병이 낫지 않고 지속되면서, 어느 순간 심리 문제로 전환된 듯했다. 그래서 내시경으로 발견을 못 했구나 싶어서 홀가분하기도 했다. 한의원에서 내가 스트레스 많이 받는 거라고 할 때는 거짓말 같았는데, 역시 완전 사기는 아니었나 보다. 원인을 안다고 당장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아는 것만으로도 큰 안심이 됐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배가 아플 수 있는 거라니, 이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변비인 사람들은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뭐, 어쨌든, 양약은 못 먹게 생겼으니 심리상담을 받든가 영양제를 먹든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