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처방해 드릴 수가 없어요. 병의 원인을 알아야 치료할 텐데, 원인을 모르잖아요.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 갔다. 대학병원을 두 군데나 갔는데, 어느 곳에서도 치료해 주지 않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하루빨리 낫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장은 점점 더 나빠졌다. 뭐라도 하고 싶던 차에 마침 한의원이 떠올랐다. 한약은 병을 직접적으로 치료하기보다는, 건강을 강화하는 목적이니까 지금 나에게 딱 맞을 것 같았다.
한의원에 대해 알아보니 내과, 이비인후과처럼 한의원도 저마다의 전문 분야가 있었다. 대체로 다이어트나 교통사고를 전문으로 했는데, H한의원은 장 문제를 전문으로 했다. 게다가 ‘한방신경정신과한의원’이라는 특이한 타이틀도 달고 있었다. 새로운 조합이 낯설기도 하고, 인터넷에 후기가 없어서 사기는 아닐까 걱정됐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일단 가 보기로 했다.
한의원은 10년도 더 전에 엄마를 따라서 갔던 것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에게 한의원은 낡고, 약재 냄새로 가득하고, 안경을 코끝에 걸친 할아버지가 맥을 짚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그런 이미지였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도착한 한의원은 의외로 아늑했다. 전반적으로 아이보리 톤이었고, 바닥과 가벽은 밝은색의 나무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 자그마한 화분이 놓여 있었고, 은은한 아로마 향기가 퍼졌다. 작게 깔린 클래식 음악 위로 ‘예약하고 오셨냐’고 묻는 간호사 선생님 목소리가 ASMR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병원 끝에 위치한 방으로 이동했더니, 포근했던 느낌과는 달리 나름 최신식이었다. 선생님은 이마와 손가락에 알 수 없는 장치를 부착해 주고는,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기다리라고도 했고, 화면에 나오는 퀴즈를 풀어 보라고도 했다. 뇌파를 측정하는 거라던데, 고작 전선 여섯 개로 뭘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쨌든 테스트를 끝내고 상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나무, 사람, 집 같은 것들을 그려 보라고 했다. 신문물을 맛본 뒤라 그런지 너무 뻔하게 느껴져서 대충 쓱쓱 그리고 끝냈다. (이후 상담에서 그림에 대한 언급이나 해석은 없었기에 어디에 쓰였는지는 모르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홀리듯이 이런저런 검사까지 하게 되어, 이게 맞나- 고민을 시작하려던 차에 상담실로 한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4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작고 여린 여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가지고 온 차트를 보여주며 말했다.
“뇌파를 보면 스트레스 수치가 엄청 높으세요.”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도 있나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도 있나? 현대인들은 다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거 아닌가? 뭐, 아무렴 어떠랴. 한약을 처방해 주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쿨하게 카드를 긁었다. 드디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병원을 나서자마자 엄마에게 전화해서 자랑했다. 함께 기뻐해 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왜 그렇게 비싸게 결제했냐는 타박이 돌아왔다. 급하게 전화를 끊고 검색해 보니, 부르는 게 값인 한약은 최소 1,500원, 평균 27만 원 정도였고, 최대 61만 원까지 간다고 했다. 나는 병신같이 60만 원을 결제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그것도 아주 신나게.
병원에 오기 전, 먼저 전화로 한약값을 물어보았는데, ‘일반 심리상담과 달리 정신과 진료로 분류되어 상담비가 저렴하다’고 했다. 그땐 왜 상담비가 저렴하다고 안심했을까. 한약값을 알려 주지 않는 이유를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또, 결제하기 전에 선생님은 ‘한약은 주문 즉시 제조에 들어가고, 개인 맞춤형이기에 환불이 안 된다’고 했다. 왜 ‘개인 맞춤형’이라는 말에 좋아했을까. 이제 그만 좀 낫고 싶다는 생각에 판단이 흐려졌던 듯했다.
진짜 황당한 건 따로 있었다. 한약 복용을 시작하고 며칠 뒤에 진행된 첫 진료에서, 한약을 먹는 동안 어땠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배가 아팠다고 답했다. 나에게 복통은 일상이었기에 원인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해맑게 웃으며 “한약이 안 맞는 것 같은데 새로 지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그 비싼 한약을 공짜로 다시 지어준다고? 원가가 얼마 안 하나 보네?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허탈함이 몰려왔다.
호구 당한 건 당한 거고, 진료는 계속 받으러 갔다. 매번 토요일 오전에 진료를 봤는데, 아픈 뒤로 집에만 있던 내가,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진료는 보통 40분씩 진행됐다. 먼저, 상담사 선생님과 15분간 상담을 한다. 선생님은 이 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기분은 어땠는지를 물었다. 일반적인 심리상담은 주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여긴 상담 시간이 짧아서인지 ‘이렇게 행동해 봐라.’ 하며 자꾸만 해결책을 제시해 주려고 했다. 그래도 상담을 통해 나와 같은 증상을 겪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되긴 했다.
상담이 끝나면 한의사 선생님이 들어와서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다. 앞선 상담이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엔 건강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 봐야, 심리와 건강은 뗄 수가 없어서, 대화는 거기서 거기다. 그래도 선생님은 ‘장은 음식을 밀어내야 하는데, 장이 비어있으면 더 과하게 움직이게 돼요. 그러니 속이 안 좋아도 굶지 말고 잘 챙겨 드셔야 해요.’ 같은 말을 해 주었는데,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
진찰 후에는 침을 맞고 뜸을 한다. 선생님이 나가면서 불을 꺼 주는데,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무엇보다, 의사 선생님, 상담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모두가 신기하리만치 친절해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치료받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 같은 침과 핫팩 같은 뜸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 어쩔 수 없다. 이왕 한약을 구입하고 한의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나아야만 한다. 한약을 먹는 동안은 식습관에 더욱 신경 쓰면서 이 기회에 완전히 낫는 수밖에 없다.
Note. H한의원 후기
장점
전국적으로 지점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심리상담이나 정신과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볍게 시도해 보기 좋겠다
약은 비싸지만, 회당 진료는 36,000원으로 비교적 저렴하다. 일반적인 심리상담이 회당 10만 원 정도 하는 걸 고려해 보면, 꾸준히 다녀도 부담이 덜하다.
방에 가만히 있으면 선생님들이 번갈아 들어 오셔서 편하다. (상담 선생님께 했던 얘기를 의사 선생님께 또 해야 하는 건 조금 비효율적이지만 말이다.)
한약을 안 짓고도 진료만 볼 수 있다. (말은 그렇게 하던데 눈치를 줄지는 모르겠다.)
단점
치료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다른 한의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한 주 뒤만 예약이 가능해서 일정 잡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리마인드는 문자가 아닌 전화로 직접 주는데, 업무 중에도 연락이 와서 너무 귀찮다. (지점마다 다를 수도 있다.)
결론 : 나는 총 5회 방문했고, 건강 문제로 우울해지거나, 심리 문제로 몸이 아파지면 다시 다닐 의향이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지만 있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