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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비 Jun 30. 2021

밤송이 열리던 날

백록수필작가회 도민 공모전 수상 가작

  가을이 되어 아이와 산책을 나섰다.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잠시 걷다보니 알이 꽉 차 여문 밤송이가 발에 차인다. 몇 개를 줍다가 따가운 가시에 찔려 손이 얼얼했다. 밤송이도 성실히 품어온 제 알밤을 지키려고 하나보다 하며 아이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알밤을 품고 있는 밤송이를 보자니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던 날들이 생각났다.



   첫 아이를 출산하던 날이었다. 새벽 4시쯤 태아가 신호를 보내왔다. 출산예정일을 열흘 앞둔 때였다. 예상보다 이르게 세상 빛을 보고 싶어 하는 아기가 반가웠다. 아직 통증이 느껴지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해가 밝아올 때까지 다시 잠을 청해볼까 했지만 쉽사리 눈이 감기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출산을 하기로 예정한 조산원에 갔다. 조산원장님은 자궁 문이 반 이상 열려있으니 늦어도 오후가 되면 아기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집에서 가서 쉬다가 진통간격이 더 짧아지면 다시 오라고 했다.


   긴 시간이었다. 배가 아픈 것은 두말할 것이 없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병원에서는 출산과정이 이 정도로 진행되면 산모의 통증을 경감시켜주는 무통주사를 맞거나, 유도분만을 진행한다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연출산을 결심했던 나에게 없는 선택지였다.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 때부터 아기를 낳을 수 있을 몸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잘 익은 밤송이가 시간이 되면 탁 벌어지는 것 같이 아기가 준비되어 나올 때를 기다렸다.


   점심때가 되었다. 나는 진통을 견디며 점점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이 무엇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배를 움켜쥐고 걷고 서기를 반복하며 근처 돈까스 집으로 갔다. 아이를 낳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며 고통이 사그라들기 기다려 한 입씩 먹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남편과 서로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예상했던 시간이 지나도록 진통은 계속 되었지만 아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인위적 시술 없이 아기를 낳기 위해 걷는 운동을 하고, 낮잠을 자면 아기가 많이 커진다고 출산이 힘들다는 말에 기다리다 마음이 조급해져 해가 어둑어둑해갈 무렵 다시 조산원에 찾았다. 


   진찰을 해보니 자궁 문이 거의 열려 내 몸의 준비는 되었지만 아기가 더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아기가 내려오는 것에 도움을 주는 의자에 앉아 두 어 시간 호흡을 했다. 앞이 보였다 안보이고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밤송이 가시 같아져서 남편이 ‘괜찮아?’묻는 말에도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아기가 조금 더 자궁입구로 내려왔을 때 양수 터트려 분만 준비를 했다. 출산하는 엄마보다 열 배쯤 더 힘든 고통을 견디며 세상 밖으로 나올 아기를 생각하니 아기에게 전달될 산소가 부족할까 싶어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두 시간 정도 힘주기를 하고 눈 앞에 별을 열 개쯤 보았겠다 싶을 때 ‘응애’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산책길에 주워 온 알밤을 삶아 아이에게 주었다. 알밤을 떠먹는 아이의 조그맣고 야무진 손을 바라본다. 토실토실한 알밤을 키워내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 때부터 작은 씨앗을 틔워 지켜 온 밤나무를 아이가 떠올릴 수 있을까. 아이가 한 숟갈 한 숟갈 알밤을 입에 떠 넣을 때마다 나의 배도 같이 불러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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