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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웜띵 Oct 25. 2022

용감한 202호 언니

서로에게 믿는 구석이 되어줄 것

  띠잉.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올라타자마자 입주민 게시판 옆에 붙어 있는 네모난 메모지 한 장과 그 아래 놓인 사탕과 초콜릿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쪽지를 읽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202호 언니의 글이라는 것을.


  반나절의 외출을 마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부르는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이번엔, 아침에는 없던 간식 꾸러미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눠주어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쪽지부터 한 페이지에 달하는 편지까지, 투명한 간식 봉지 안에 함께 담긴 채 말이다. 우리 라인의 나눔 릴레이는 주말이 지난 월요일까지도 이어졌다. 딱딱하고 네모난 철제 공간이 몽글몽글한 손길들로 채워진, 정말 대단한 3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




  아랫집에 사는 202호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용감하다. 지난 5월, 나는 이 아파트 302호로 이사 왔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잔뜩 긴장한 채 아래층에 내려가 초인종을 눌렀던 그날은, 내게 잊지 못할 인연을 틔워 주었다. 얼마 전 이사 왔는데 아이가 어려서 뛰지 말라 해도 뛰려 한다고, 따끔하게 주의를 줄 테니 부디 이해해달라는 말로 첫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왔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집을 비우는 편이니 그 시간에는 마음껏 뛰어놀게 하라고, 꼭 그때가 아니어도 같이 아이 키우는 입장인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뛰는 문제로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진 않아도 될 것 같다고. 건성으로 알겠다며 문 쾅 닫고 들어가는 아랫집을 만나게 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며 내려갔는데,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용기 내어 내민 나의 손을 언니는 덥석 잡아주다 못해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었다. 그 뒤로도 언니는 기꺼이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다. 손이 커서 전을 많이 부쳤다며 쟁반 가득 파전을, 아이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던 말이 생각나 장난감 가게에 들른 김에 사 왔다며 귀여운 고양이 인형을, 간 안 된 아이 밥만 하느라 매운 음식 먹어본 지 오래됐을 것 같아 끓여보았다며 돼지고기 담뿍 넣은 김치찌개를 올려 보냈다. 오지랖 부린다는 말 들을세라 이웃 간에 정을 나누기가 여의치 않아진 세상이다. 이 시대에 언니와 같은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용감하다 할 수 있을까.




  카페 가는 걸 좋아했던 나였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는 신상 카페에 가는 게 망설여지곤 한다. ‘노 키즈존’이라 딱지 붙은 곳은 생각보다 많았고, 밖에서 커피 마시는 시간은 눈칫밥 먹는 시간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애가 있는데 굳이 사람 많은 곳까지 나와서 커피를 마시고 싶냐는 듯 눈길을 보내는 이들에게 유난 떠는 이웃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나눔 릴레이를 지켜보고 나니, 어쩌면 내가 타인을 지나치게 매정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주변에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는데, 단단히 착각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불신은, 누가 뭐라 한 적 없는데도 스스로를 ‘유난’ 떨지 말자고 다짐하게 만든다. 반면 타인에 대한 신뢰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편히 마셔도 된다고, 남의 자식에게 관심 기울여도 된다고, 먼저 초인종 눌러도 된다고, ‘용기’를 내게 만든다. 나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믿는 구석이 되어 주고 싶다. 202호 언니처럼.

어느 구석에서든 용기를 보낼게요.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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