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고 싶지 않아요
두 돌을 앞둔 우리 아이와 붙어 다니다 보면, 어림잡아 일주일에 세네 번은 받는 질문이 있다. “어린이집 안 다녀요? 엄마가 힘들겠다~.” 우리 친정 엄마도 안 하시는 걱정을 해주시는 감사한 분들이 꼭 계신다.
육아를 하기 전에도 주위엔 이상한 걱정 쟁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좋은 대학에 가려고 재수하느냐, 뭘 하려기에 졸업을 앞두고 휴학을 하느냐, 군인과 결혼한다던데 남편 집이 잘 사느냐, 그 대학까지 나와서 전업 주부로 살아도 되겠느냐, 둘째는 언제 낳느냐, 외동은 애가 외로워서 안될 텐데, 거기까지 이사 가서 어떻게 사느냐. 몸 둘 바 모르게 만드는 이런 류의 걱정은 내 사정 알 만큼 아는 지인의 입에서도 나오곤 해서 흘려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종종 나의 삶을 잘잘못 가리는 재판장 위에 세워 바라보게 만들었다.
물어보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로켓단도 아닌데 그런 질문과 걱정에 일일이 답하려 애썼다. 말문이 막히면 나의 지난 선택들을 의심했다. 지금 휴학하는 게 진짜 맞아? 이 사람과 결혼해도 정말 괜찮겠어? 평생 주부로만 살게 되면 어쩌지? 둘째가 필요하긴 하다던데. 생각에 잠겨 있다 정신 차려 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 앞에서 작아졌던 내가 억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있었다. 분한 마음을 혼자 품은 채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하소연하며 그들이 틀렸음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사실, 한껏 열 올리며 털어놓을 거리도 안 되는, 기껏해야 가짜 걱정들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자라면 보여주고 싶은 일러스트가 있어 캡처해둔 페이지가 떠오른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다른 질문 없냐며 반문하는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다. 무례한 걱정 쟁이들 앞에서 내가 꺼내야 했던 대답은, 쩔쩔매며 나를 이해시키려고 대화를 이어나갔던 말들이 아니라 “자, 다음 질문이요.”라는 단호함 아니었을까.
온갖 차원의 식이 나열되고 마지막 줄엔 결괏값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낸 ‘카이스트 학생들의 사랑 고백법’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은 한때 SNS상에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은 적 있었다. 그 글 아래에는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문송합니다.’라고 적힌 댓글이 많이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나 역시 문송한 사람 중 하나) 수능 4점짜리 문제의 해설처럼 길었던 그 이과생의 글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문송한 이들의 부족한 수학적 지식과 이해력을 탓했지, 이런 사랑 고백법도 있다고 알려준 카이스트생을 잘못되었다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기꺼이 그들의 편협함을 안타까워해주자. 누군가의 지나온 삶을 축소하려 든다면 더더욱 말이다. 짠내 풀풀 나는 그들에게 이해받기엔 우리의 그릇이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