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무조건
짧다면 짧은 시골살이를 하며 얻은 사실 하나는, 시골살이는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데에서 재미가 붙는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아주 이른 시간부터 버스정류장 근처로 산책을 나선다. 동네 주민을 만나면 버스가 보통 몇 시쯤 오는지 여쭤보면서 인사를 나눈다. 난생처음 마주하는 얼굴들이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다.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 하다 목 좀 돌릴 겸 고개를 든 순간,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들던 옴짝달싹한 그런 느낌은 여기에 전혀 없다.
기다림 끝에 도착한 마을버스를 타고 도서관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다. 도서관까지는 또다시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도착한 도서관에서 아이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만 하고 갈 순 없습니다. 어무니..!' 하듯이. 과연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우리에게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휴식과 같을 수 있었을까? 군가족이 된 이후 시골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있는 지금의 삶은 불평스럽기보다 감사함이 스민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주변에 피어 있는 강아지풀, 여뀌, 토끼풀, 코스모스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벌이 제 몸통에 노란 꽃가루를 듬뿍 묻히고 작은 두 날개를 붕붕대며 둥글게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담긴다. 이 꽃에 앉을까, 저 꽃에 앉을까 갈팡질팡하는 나비를 보고 있으면 결정장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한다. 지난여름 하얗고 기다란 꽃이 피었던 자리에 가을이 된 지금은 손바닥만 한 깻잎이 자라 있고, 연둣빛이던 강아지풀은 어느새 누렁이 꼬리처럼 변해 있다. 미처 거두지 못해 비를 맞고 잔뜩 찡그린 채 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고추를 보면서 이 밭 주인장의 얼굴빛이 고추를 닮아 불그무레해지진 않을까 걱정해보기도 하며, 그렇게 버스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 시간이 즐거워서라도 일부러 차를 몰고 나가지 않는 날도 생겨나고 있다.
3년 전엔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버스가 제때 오지 않으면 뭔가 잘못되었으리라 종종거렸던 예전의 나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풀과 꽃들이 각자의 신비로움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나뭇잎과 기둥만 보고도 그 나무 고유의 이름을 알아보는 그런 눈을 부러워한다. 불과 3년 만에 한 사람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
물론 태생부터 도시에서 자라왔기에, 지금의 삶을 이전의 삶보다 좋아하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우여곡절이 뭐였는지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이 좋다. 여기까지 이사오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을 새로운 챕터가 펼쳐졌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단순히 시골에서의 안분지족을 찬양하려는 끄적거림은 아니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다녀오며 아빠 차 안에서 “시골은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그치?”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내게 ‘20년만 지나보거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릴 적부터 인생의 도착지처럼 여겨온 행복이라는 건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받지 못할 거라고.
도심 속 인도의 작은 틈을 비집고 피워낸 꽃을 보고 감명받을 수 있다면, 시골길을 걷다 풀잎 위에서 숨바꼭질하고 있는 여치를 보고 반가워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은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깨달음은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굴곡에도 두 다리 휘청이지 않도록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에는 '행복은 풀과 같습니다. 풀은 사방천지에 다 있어요.'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이 저자는 작가 고미숙 씨의 책 속에서 발견한 한 구절을 여기에 보탠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여기에서 '해방'을 '행복'으로 바꿔보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우아하고 고급지게 표현해둔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인생, 내 계획대로 펼쳐지지 않을 테지만, 시골살이 중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다녀오며 얻은 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로 하며 이 글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