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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웜띵 Oct 21. 2022

병든 그림책방

다름을 존중하며

  곤히 잠든 아이를 한참 바라보던 남편이 마른 목소리로 입을 뗐다. 이렇게 어여쁜 우리 아들이 언젠가는 입시 레이스의 한 주자가 될 테고 그 뒷이야기는 자신이 겪은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짠하다 했다. 잠깐 슬픔에 빠져 있는 남편을 괜스레 부추겼다. 선배 군가족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대부분 학군이나 입시 때문에 두 집 살림을 하게 된다더라며. 하지만 두 집 살림이 비단 군가족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부분일까.


  운동장에서 사라진 아이들, 학원을 가야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풍문은 더이상 충격적이지도 않은 걸 보면 아닌 것 같다. 거의 십여 년을 책상 앞에 앉아 숨가쁘게 뜀박질을 하다 대학에 들어간다. 그러나 숨 좀 고를 겸 대학에서 낭만 타령하다가는 뒤처진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 취업을 하면 결혼, 결혼을 하면 자가 마련과 연봉 올리기에 혈안, 쉰 줄에 들어서면 자식의 대학과 직업에 따라 자식 농사 잘 지었네 못 지었네 타령으로 이어진다. … 이 끝 모를 타령은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있었고, 우리 할머니 세대에도 있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유로워지기는 커녕 어딘가에 단단히 갇혀가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걸 보이지 않는 상자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문득 지난여름 남편과 나눴던 짤막한 대화가 떠오른다. 문화센터에 다녀와서, 고야드 백을 든 사람이 우리 단지 사람이었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이에 남편은, 그 가방을 갖고 싶어 했냐며 그 가방이 그 브랜드 거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그리고 나는 답했다. 요즘 삼십 대면 그 정도는 많이들 든다고, 얼마쯤 하는 거라고. 동네 주민이었던 그분을 설명해낸 말이 고작 명품백 하나였던 것, 거기다 그 가방이 무슨 삼십 대 필수템인 양 조잘댔던 것 모두 지금 생각해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를 가두고 있는 망할 놈의 상자를 분리수거장에 던져버리고 싶다면서, 그 상자 안에 들어가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 있었던 꼴이었다.

엉덩이가 무거워서 탈입니다.




  지난 9월, 아이와 함께 그림책 원화 전시를 보러 한 책방에 다녀왔다. 대게 군부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외지다 싶은 곳에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내비게이션이 남편 부대를 지나, 양 옆에 수풀이 마구잡이로 자라 있는 길 안쪽으로 안내를 계속했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자 빨간 지붕을 얹은 책방이 나왔다. 요즘 책이 팔리지 않아 문 닫는 서점이 많다는데 이 깊은 곳까지 와서 책방을 연 데에는 분명 엄청난 사연이 있으리라. 어떻게 책방을 운영하게 되셨는지 여쭤보았다.


“그림책 좋아하는 마음이 병이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사장님은 책방을 연 까닭을 ‘병’이라고 표현하셨다. 나와 아이는 사장님의 병을 치유하고 있는 병원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병원치고는 참 따뜻하고 생기가 넘쳐흘렀지만. 편하게 있다 가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사과 반 쪽을 정갈하게 잘라 내어 주셨다. 정녕 아픈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여유와 따스함을 베푸셨다. 이런 게 병이라면 차라리 앓고 싶은 지경이었다.


  남편이 평온하게 잠든 아이를 보며 걱정 어린 눈을 쉽게 거두지 못했던 사연도, 내가 사지도 않을 가방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이유도, 병든 척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안전하게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려 애쓴 세월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상자는 어느 한쪽 면도 구겨지지 않은 채 수많은 세대를 거쳐온, 굉장히 보편적으로 짜인 틀일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것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 않나.




  두 시간 남짓의 그림책 여행을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앉은 자리 뒤편은 벽 전체가 커다란 전면 책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그림책 표지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알록달록하고 모양도 제각각 달랐다. 그런데 어느 하나도 유난히 튀지 않았다. 유난인 사람이 되어 손가락질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숨기는 편이 나은 인간 세상과는 정반대였다.


  모든 사람이 상자 밖으로 나와 자기만의 병을 숨기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 세상도 책방의 그림 책장처럼 조화로워 보일 것이다. 알록달록한 그림 책장 같은 세상에서 자유롭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각자 내면의 특별함을 자랑스러워하여 빛이 나고 타인의 반짝거림과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세상에서.

당신의 병, 아니 반짝거림은 무슨 빛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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