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표면

선, 덩어리, 흔적으로 구축된 조형 언어 - 신제현 작품 감상

by 김정승

신제헌의 조각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의 형상을 본다는 행위 너머, 기억의 저편에서 밀려오는 감정의 덩어리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의 작업은 형태 너머에서 솟구쳐 오르는 감각의 층위를 따라 움직인다. 표면에 부딪히기 전에 먼저 정서적으로 와닿는 물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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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2024)은 감정의 응축된 덩어리가 입체적으로 부풀어 오른 형상이다. 제목은 인간 감정의 네 가지 극을 모두 지시하지만, 작품에서 강하게 감지되는 정서는 '희(喜)'나 '락(樂)'보다는 '노(怒)'와 '애(哀)'에 가깝다.


무게감 있는 질료와 거친 표면, 분출하듯 솟은 형상은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덩어리째 응고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악마적 존재'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형상을 지탱하는 인물의 머리와 몸으로부터 스스로 자라난다. 떼어낼 수 없이 얽힌 감정의 근원은 결국 자기 자신이며, 조각은 고통과 혐오가 뒤섞인 자기 인식의 육화로 읽힌다.


색과 재료가 뭉개지고 응고되며 분리되지 못한 채 공존하는 이 상태는 감정과 존재의 비극적인 중첩을 드러낸다. 이 고통의 조형은 감정이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 자리한 번뇌와 집착에서 기인한다는 불교적 인간 이해를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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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들은 부피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표면에는 손끝에 남은 힘과 감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자국은 감정을 긁어내듯 조형화된 상흔이자, 표면을 깊이 파고든 물리적 감각의 흔적이다. 콩테로 긋고 할퀴듯 남겨진 선들은 조각의 몸을 따라 상처처럼 흘러가며, 단순한 우연이 아닌 강한 의도를 품은 선으로 읽힌다.


조급함과 답답함, 통제하려는 욕망이 응축된 이 선들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내고 굴복시키려는 감정의 분출처럼 보인다. 날카롭게 새겨진 자국은 누군가의 강렬한 감정이 대상에게 새긴 흔적이자 흐려져 가던 감정을 다시 붙잡아 고정시키려는 의지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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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작가의 일부 작업에서는 마치 2차원 콩테 드로잉이 돌출되어 3차원으로 솟구쳐 오른 듯한 감각이 있다. 경직된 부피감은 종이를 찢고 튀어나온 듯한 조형으로 기억 속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형상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되살린다. 흐릿한 감정의 잔상을 따라 조각이 육화 되는 과정은, 망각에 저항하는 감각의 몸짓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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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형상으로 표현된 <감정의 이면>(2024)은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차단하고 덮어버리는 것을 택한다. 표면은 깊은 검은색으로 잠식되어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오로지 상상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절반의 신체에서 뾰족하게 솟은 형태는 평온과 동요 사이의 갈등을 머금고 있으며, 분출되지 못한 감정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우뚝 서 있다.


신제헌의 조각은 감정과 기억, 내면과 외면, 고통과 자기혐오 사이의 복잡한 결을 응축해 낸다. 그는 감정의 파편을 조각이라는 매질에 매개하며, 그것을 해체하거나 엮어내는 방식으로 감정의 새로운 윤곽을 그린다. 덩어리로 뭉쳐진 감정의 흐름은 형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고, 그 앞에 섰을 때 감춰왔던 감정이 내면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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