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스한 골방 Dec 14. 2023

정신과 상담 사용설명서

치료 초기에 생기는 실망들에 대하여

  최근, 정신과 치료에 실망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는 치료를 중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듣는 의사 입장에서는 마냥 안타까운 감정이 앞서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사가 아닌 환자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솔직히 치료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많이 불안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전보다 문턱이 낮아졌다 해도, 정신과 치료를 시작해 보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정신과 치료를 해보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신과 치료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정신과 진료실에서 상담을 시작하는 순간에, 그 기대는 어느 정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세상에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듯이, 정신과 진료실에서도 기대해 왔던 모습 그대로의 의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신과의 증상들은 장기적 치료를 요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상담 초기에 느꼈던 실망감이 컸다면,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치료도 난항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시작할 때 실망할 가능성이 높은 부분들에 대해서 미리 설명해보려 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것이 사람 마음인지라, 정신과를 방문하셨을 때의 상처 적어졌으면 해요. 그리고 정신의학에서는 상담이라는 표현 대신 정신치료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일반적인 상담보다는 치료의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상담 대신 정신치료라는 단어로 자주 사용하도록 할게요


  우선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며 의사와 잘 맞지 않아 고생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환자도, 의사도 모두 각자의 개성을 지닌 사람이기에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환자-의사 관계를 치료적 동맹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정신의학에서는 동맹과 같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의사-환자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 자체만으로도 치료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치료 초반에 환자-의사 관계가 긍정적이지 않다면 어떨까요? 치료를 포기하거나 다른 병원에 가보는 것이 최선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치료 초반에 서로 맞지 않아 불협화음이 생기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치료적 동맹이 회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서로 삐그덕거리는 과정이 환자에게 대인관계를 연습하는 시간이 되어 치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특수한 관계이긴 해도 치료적 동맹도 사람 사이의 관계니까요.

  치료적 동맹이 굳건하게 맺어질 수 있다면, 그 시기가 조금 늦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진료실에서 실망하시는 일이 있으실 때, 한 번만 더 같은 진료실을 방문해 보는 것도 고려해보셨으면 합니다. 그 뒤에도 이 의사와는 맞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때 병원을 바꾸셔도 늦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의사가 증상과 관련 없는 정보들을 물어보는 것 같아 불편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처음에 정신의학을 배울 때는 이런 것까지 물어봐야 하나 싶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형제자매의 숫자와 출생순서와 같이 뜬금없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력과 같은 민감할 수 있는 정보까지 물어봤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정신과 의료기록은 대학병원에서도 관리를 철저하게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처음으로 보는 환자들에게 여전히 물어보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사소해 보이는 정보도 나중의 치료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자매는 몇 명이고, 나는 몇 번째 자녀인지를 도대체 왜 물어보는걸까요? 같은 부모가 키우더라도 첫째 딸을 키울 때와 막내아들을 키울 때가 다를 수 있습니다. 당장 부모님의 육아경험의 유무도 다르고, 시간이 흘렀기에 부모님의 사회적 위치도 다를 겁니다. 이러한 환경의 차이는 양육방식의 차이를 부릅니다. 그리고 양육방식의 차이는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정신과에서, 특히 초반 상담들에서 현재 증상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한 정보들에 대한 질문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의미없어 보이는 대화도 분명히 앞으로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거에요.


  마지막으로, 상담 중에 의사로부터 명확한 해결책을 듣지 못해 답답하실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신치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어요. 정신치료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환자가 원래의 건강했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의사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조언 속에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들어갑니다. 때문에 조언을 듣는 환자는 본인의 가치관이 아닌, 의사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는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 조언은 자제하는 편입니다. 대신 질병에 대한 지식, 위기 상황시 대처법과 같은 객관적인 정보들을 제공해서 도움을 드리려고 하죠. 저도 마찬가지로 섣부른 조언은 안 하느니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사족일 수 있겠지만, 같은 이유로 저는 진료실 밖에서의 상담을 현재로서는 지양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환자와 의사 모두 예민할 수 있는 주제일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많이 반복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글을 완성한 것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정신과 치료가 잘 유지되지 않는 분들을 보며 느낀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치료를 시작해야 할지, 반대로 치료를 그만두어야 할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이 순간에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 되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고민은 안녕하신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