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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Dec 26. 2023

공감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나, 참 자기 (2)

위니캇의 대상관계이론

  이번 이야기는 2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글은 아래 링크에 첨부했으니, 시간이 되신다면 같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1부에서는 충분히 좋은 엄마, 참 자기, 거짓 자기와 같은 핵심 단어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2부에서는 참 자기와 거짓 자기가 발달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풍요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참 자기를 찾는 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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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면은 분명 불편합니다. 진짜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들을 희생하고, 내가 이루고 싶은 핵심가치들을 미뤄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페르소나를 전혀 쓰지 않은 채로 늘 참 자기의 모습만 보이면 어떨까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만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사람으로만 보일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에서 수많은 좌절과 갈등을 겪고, 참 자기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박탈당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참 자기를 적당히 묻어두고, 적당히 꺼내 쓰는 방법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나의 참자기가 험난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참 자기의 건강한 생존법'을 배우는 거예요.


  위니캇은 참 자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을까요? 보편적인 인간의 욕구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 있어요. 바로 먹고, 자고, 싸고입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들을 경험해요. 욕구들은 자연스럽게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지만, 시의적절한 부모의 도움으로 해소가 될 수 있죠. 이때 부모가 하는 일들은 아이가 신체적으로 클 수 있도록 돕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부모의 도움은 아이가 원하는 세상이 있으면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정신적인 교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배고프다고 보채면서 욕구(식욕)를 표현하는 경우를 상상해 볼까요.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의 욕구가 표현됨)
이때 부모는 아이를 안아주면서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요.  (아이의 욕구를 파악함)
그러고 나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밥을 줍니다.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킴)


  위니캇은 위의 예시처럼 아이의 밥을 챙겨주는 행동을 생존을 위한 식사를 주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더 나아가 아이의 욕구에 공감하는 행동이라고 보았어요. 이렇듯 시의적절하게 아이의 요구에 반응할 수 있는 공감적 환경을 안아주기 환경(holding environment)라고 합니다. 이러한 안아주기 환경은 아이의 참 자기가 발달하는데 필수적이에요. 아이의 욕구에 대해 잘 반응하지 못하는 부모가 있다면, 반대로 아이가 부모의 욕구에 잘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둬요. 결국 아이는 막상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둔감해진 채로 주변의 요구에만 피상적으로 순응하게 되죠.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이 아이의 상태가 바로 거짓 자기만 가득한, 빈 껍데기와 같이 공허한 자기입니다.


  아이가 필요할 때는 안아주기 환경을 적절히 제공하면서도, 반대로 아이가 필요해하지 않을 때는 안아주지 않으면서 과보호하지 않는 어머니를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고 합니다. 위니캇은 아이를 과하게 보호하는 것도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것과 같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해요. 과보호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주변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페르소나를 사용하는 방법을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해요. 페르소나를 사용할 줄 모르면 남들에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치면서 참 자기가 상처받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이처럼 과보호는 참 자기가 쓸 수 있는 사회적 가면을 뺏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위니캇이 이야기하는 최고의 보호는, 아이가 보호받는지도 모르는 채로 보호받는 것입니다. 아이가 보호를 받지 못해도 눈치를 채겠지만, 과보호를 해도 아이가 내가 계속 보호를 받고 있구나 눈치를 챌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요즘 세상에 과보호를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해요. 좋은 육아법에 대한 정보들이 많이 공유되고 있고, 그만큼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이야기되는 것들도 많아지고 있지요. 좋은 점도 있겠지만 점차 부모가 느끼는 부담감이 커져가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해요. 아이의 타고난 기질이 각각 다르고, 부모도 성격이나 환경이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각 부모-아이에 따른 양육법은 분명히 달라질 수 있어요. 하지만 정보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그런 차이들을 모두 고려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 되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 키우기도 버거운데 들어오는 정보까지 걸러 듣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부모는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는 종종 아이의 과보호로 이어질 수 있어요. 아이를 못 챙겨주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챙겨주고 후회하는 것이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안에 시달리는 부모를 위해서나 과보호 밑에서 참 자기를 잃어가는 아이를 위해서나, 과보호는 서로에게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이를 과하게 보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불안을 덜어줘서 아이를 위한 합리적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거짓 자기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참 자기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위니캇의 말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강력한 자기 치유의 힘이 있다고 합니다. 이미 거짓 자기에 익숙해진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면 잊힌 욕구와 소망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피어나는 욕구와 소망들을 다듬어서, 세상에 내보이는 연습을 한다면 참 자기가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어요. 다만 이렇게 참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과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여기 계신 브런치 작가님들도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게 되지만, 독자들이 있어서 더욱 진실된 글쓰기를 즐겁게 이어가실 수 있으시지 않으세요? 참 자기도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참 자기는 진짜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죠. 달리 말하면 참 자기는 그 사람이 만들어가는 자신만의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참 자기는 개성이자 창조성의 원천입니다. 과보호가 점차 문제되는 현대 사회에서 나오기 힘든 창조성이 강조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하게 불안하셨던 부모님들께서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믿음과 함께, 조금씩 부모로서의 부담을 내려놓는 것이 오히려 모두를 위해 좋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거짓 자기의 세상에서 살고 계시는 분들에게도 오늘부터 참 자기를 조금씩 찾아나가신다면, 언젠가 진정한 자신만의 행복을 맛보실 수 있으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함께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들에게 그런 날이 반드시 오실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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